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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철의 안 보이는 안보]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 5월1일 미시간주 프리랜드에서 선거 유세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오는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측근이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될 경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후보로 거론되는 엘브리지 콜비 전 미국 국방부 전략·전력 개발 담당 부차관보는 지난 6일(현지시각)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미국의 주된 문제가 아닌 북한을 해결하기 위해 더 이상 한반도에 미군을 인질로 붙잡아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결정 권한이 있다면 주한미군을 두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도 지난달 30일(현지시각) 보도된 주간지 타임 인터뷰에서 “왜 우리가 부자 나라인 한국을 지켜줘야 하냐”는 말로 주한미군의 존재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2015년 미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 이후 ‘한국 안보 무임승차론’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트럼프는 2015년 11월 펴낸 책에서 “2만8천여명의 미군이 북한과의 국경에 주둔하고 있는데 매일 위험에 처해 있다”며 “한국을 방어하는 건 오직 이들”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그는 ‘한국이 미군 주둔 비용인 방위비 분담금을 한해 9200억원씩 낸다’는 반론에 대해서는 ‘푼돈’(peanut)이라고 깎아내렸다.

지난 2022년 발간된 마크 에스퍼 전 국방장관 회고록을 보면, 2019년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를 여러 번 주장하자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이를 만류하며 “대통령님, (주한미군 철수는) 두번째 임기 때 우선순위로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달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폼페이오 장관이 일단 급한 불을 끄자는 생각으로 했던 말이 5년 뒤 현실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육군 5공병여단은 지난 3월11일부터 2주 동안 경기 파주시 임진강 일대에서 미2사단·한미연합사단 11공병대대와 함께 한-미연합 제병협동 도하훈련을 실시했다. 주한미군 페이스북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시 주한미군의 전략적 가치와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 지원 현황에 대해 충분한 보고를 받고도 왜 다시 ‘한국의 안보 무임승차’ 주장을 펴는 걸까.

먼저 거래에 능한 부동산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 전 대통령이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압박하는,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를 노린 협상전략으로 볼 수 있다. 앵커링 효과는 한쪽이 먼저 제시한 수치 등이 항구에 정박한 배의 닻(anchor)처럼 기준점이 되어 그 후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말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집권 당시 1조원가량이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5조원으로 올려달라고 했던 요구는 앵커링 효과를 노린 협상 전략으로 볼 수 있다. 한국 처지에선 5배 인상 요구가 터무니없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은 먼저 기준 가격을 제시하는 쪽이 유리하다는 점을 노렸다. 만약 한국과 미국이 방위비 분담금을 2조원쯤에 합의하면, 애초 1조원에서 100%나 인상된 큰 금액이지만, 처음 요구한 5조원을 기준으로 삼으면 많이 깎았다고 착각할 수 있다.

만약 상대가 기준 가격을 수용하지 않는 태도를 보일 경우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압박하면 앵커링 효과는 커진다. 재임 당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방위비 분담금을 대폭 증액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고 한국을 위협한 것은 이런 경우였다고 볼 수 있다.

육군 제25보병사단 해룡여단은 지난 3월19일부터 10일간 강원도 인제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에서 미 해병대 3사단과 함께 훈련을 실시했다. 주한미군 페이스북

앵커링 효과를 피하려면 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주장을 뒷받침할 객관적 근거를 확보한 뒤 상대를 설득해야 한다. 한국은 방위비 분담금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주한미군을 지원하고 있음을 미국인들에게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한국의 주한미군 지원 형태는 직접 지원과 간접 지원이 있다. 직접 지원은 정부 예산에서 지출되는 것으로 주한미군에게 현금 또는 현물로 전달된다. 방위비 분담금은 직접 지원으로, 주한미군에 대한 지원 중 일부에 불과하다. 직접 지원에는 방위비 분담금 외에도 카투사 지원, 평택 기지 주변도로정비와 평택 지역 지원 등도 포함되어 있다. 방위비 분담금 1조1833억원을 합친 직접 지원 규모는 총 2조1000억원(2021년 기준)가량이다.

간접 지원으로는 토지 공여, 세금, 전기요금, 통신요금 등 공공요금, 도로·공항·항만 이용료 면제나 감면이 있다. 연간 간접지원 규모는 총 1조3000억원가량으로 추산된다.

직·간접 지원을 합치면 매년 주한미군 지원 규모는 3조원이 휠씬 넘는다. 최신 구축함인 이지스함 1척 건조 비용이 1조원대인 것을 감안하면 매년 한국이 이지스함 3척 비용을 미국에 주는 셈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9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 취임 2주년을 맞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만약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미 대선에서 당선되면 앵커링 효과뿐만 아니라 중국 견제를 위해 한-미 동맹 변경을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9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미국 대선 결과에 대해 “한-미 동맹에 관해 미국 조야, 상원·하원, 행정부의 강력한 지지가 있다. 한미의 탄탄한 동맹 관계는 변치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낙관과 달리 주한미군 문제는 전적으로 미국의 동북아 이해관계와 전략적 판단에 달려 있음을 해방 이후 한-미 관계가 실증하고 있다. 주한미군은 △1949년 6월 완전 철수 △한국전쟁 때 최대 33만명이던 미군을 1954년 휴전 직후 8만5천명만 남긴 채 철수 △1970년 제7사단 1만8천명 감축 △1977년 카터 대통령 6천명 감축 △1990년 1만5천명 감축 △2005년 1만명 감축 등 지금까지 모두 6차례에 걸쳐 전면 철수 또는 감축이 진행됐다. 미국이 미군 철수·감축과 관련한 정책결정을 할 떄, 동맹국인 한국과 합의하거나 깊이 있는 협의를 거친 예가 없었다.

1971년 미국이 주한미군 7사단을 일방적으로 철수한 뒤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에 나섰다. 사진은 박 전 대통령의 ‘자주국방’ 붓글씨. 국가기록원 갈무리

1966년 3월8일 정일권 국무총리는 베트남 파병 동의안을 심의하는 국회에 나와 “미국 정부로부터 현재 수준의 주한미군병력을 계속 유지시키겠다는 문서상의 보장을 받았다”고 말했다. 1969년 닉슨 미국 대통령은 ‘아시아에서 재래식 전쟁이 발발할 경우 그 방위의 1차적 책임은 당사국이 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미국은 1971년 3월, 한국에 주둔하던 미 7사단을 일방적으로 철수시켰다. 미 7사단이 철수하고 10일 뒤 미국은 탁구 대표팀이 중국을 방문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미-중 관계 정상화를 연 ‘핑퐁 외교’였다. 미국은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란 세계 전략을 위해 약소국 한국의 처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미국의 ‘배신’에 충격을 받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0년대 초부터 자주국방을 주창하며 방위산업 진흥,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및 남북대화 시작,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다시 당선되고 주한미군 철수·감축 상황이 닥치면, 한국은 19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랬듯 자주국방을 지향하면서 남북관계 변화, 미국에 의존한 무기개발과 구매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를 해야 할 수도 있다.

콜비 전 부차관보는 “가능한 이른 시기에 (한국군으로) 전시작전권을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윤석열 정부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전작권 환수를 트럼프 진영에서 강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트럼프 리스크’에 대비하려면 지난 2년간 손을 놓고 있던 전작권 환수도 서둘러야 한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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