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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호스 잡은 구급대원
고 임성철 소방장이 지난해 12월 1일 화재 진압 도중 콘크리트에 깔려 순직한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세화리의 한 창고에 국화가 놓여 있다. 제주소방본부 제공


80대 노부부가 사는 주택 창고에서 불이 났을 때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119구급대였다. 2023년 12월 첫날, 고향 제주로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임성철 소방교(당시 29세·순직 후 소방장으로 특진)도 제주동부소방서 표선구급대 구급대원으로 현장에 출동했다.

제주의 한 대학 응급구조학과를 졸업한 임 소방교는 불을 끄는 진압대원이 아닌 ‘119구급대원’으로 소방관 일을 시작했다. 그는 2019년 5월 경남창원소방본부 소방관 채용해 합격해 구급대원으로 활약한 ‘경력직’이었다.

소방공무원 중 구급 업무는 신속 정확한 응급환자 처치와 병원이송이 주요 임무다. 구급대원에 응시하려면 의사·간호사 면허증 또는 응급구조사 1급 자격증을 취득한 뒤 병원 등에서 응급의료업무를 2년 이상 수행한 경력이 있어야 한다. 필기시험 과목에도 응급처치학개론이 포함돼 있다. 의학적 전문지식이 필요한 모든 구급대원은 경력 채용으로 뽑는다.

창원에서 2년간 일했던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2021년 3월 제주소방본부의 구급대원 경력 채용에 다시 응시했다. 소방관들이 지역을 옮기려면 ‘1대1’ 교류를 해야 한다. 제주는 근무하고 싶은 소방관들이 많았다. 교류 순번이 밀려 다시 시험을 다시 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일하던 나날 중 한날이었다.

2023년 12월1일 오전 0시 49분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의 한 농가의 감귤 창고에서 불이 났다. 신고를 받은 제주동부소방서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표선구급대에 출동 지령을 내렸다. 임 소방교가 탄 구급차는 6.3㎞ 떨어진 화재현장에 8분 만에 도착했다. 구급차보다 덩치가 큰 펌프차는 1분 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구급차에는 운전대원을 포함해 3명이 타고 있었고 펌프차에도 선착대장과 진압대원, 운전대원 등 3명이 탑승했다. 펌프차에 물을 공급하는 탱크차도 출동했다. 불이 난 곳으로 소방호스를 전개하던 선착대장은 창고 옆에 있는 주택 현관에서 노부부를 만났다.

선착대장 지시를 받은 임 소방교는 노부부를 서둘러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곧바로 구급차로 돌아가 방화복과 공기호흡기, 헬멧, 장갑을 착용했다. 화재를 진압하는 진압대원의 장비였다. 임 소방교는 직접 펌프차로 걸어가 소방호스의 ‘방수 개시’를 요청했다.

펌프차는 화재 진압을 위해 2개의 소방호스를 폈다. 진압대원이 첫 번째 소방호스를 틀었지만 물이 나오지 않았다. 임 소방교가 남은 1개의 소방호스를 발견하고 직접 화재 진압에 나섰다. 구급대원인 임 소방교가 집어 든 호스에서 첫 방수가 이뤄졌다.

임성철 소방교가 지난해 12월 순직한 사고 현장인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세화리의 불 난 창고 현장 모습이다. 지난달 29일 이곳을 찾았을 때 창고와 잔해는 철거된 상태였다. 제주|김현수 기자


사고 당일 감귤 보관 창고에서 난 불은 임 소방교가 소방호스를 집어 들었을 때 ‘최전성기’로 향하며 불길이 거세지고 있었다. 다른 지역 펌프차도 현장에 속속 도착했다.

오전 1시 8분, 소방호스로 불을 뿌리던 임 소방교 머리 위에 있던 창고 처마가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처마 무게는 8950㎏. 온몸이 콘크리트 더미에 깔린 그의 오른팔은 소방호스를 잡은 채 마지막까지 불이 난 창고를 향하고 있었다.

현장을 목격한 소방대원들이 손으로 잔해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유압기 등 구조 장비를 동원해 오전 1시 14분 구출했지만 숨진 상태였다. 그가 착용했던 헬멧은 콘크리트 낙하 충격으로 깨져 있었다.

임 소방교가 순직하자 소방청은 14명의 전문가로 조사단을 꾸려 한 달간 사고를 살펴봤다. 조사단은 화재 현장에 진압대원 3명을 포함해 7명의 소방관이 출동했지만 인원이 부족했던 점을 확인했다. 표선구급대는 원래 펌프차에 4명이 탑승한다. 이날은 1명이 출장을 가면서 3명이 출동했다.

불을 끌 수 있는 펌프차에는 지휘를 담당하는 선착대장과 운전대원을 제외하면 진압대원은 1명뿐이었다. 인원이 부족해 구급대원인 임 소방교가 진압대원 역할까지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진압 현장이 엉망이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사고조사단 보고서를 보면 현장에서는 소방대원 간 구체적인 임무 분담도 없이 선착대장과 진압대원이 각각 소방호스를 끌고 갔다. 그중 1개의 호스가 꼬이면서 6분이 지나도록 물을 쏠 수 없었다. 임 소방교가 집어 든 호스도 처마가 붕괴하기 직전까지 3분 30초 동안 방수압력이 불량했다.

고 임성철 소방교(사진 속 동그라미)가 지난해 12월 1일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세화리 창고 화재 진압을 위해 방화장갑 등을 착용하고 있다. 제주 창고 화재현장 붕괴 순직사고 조사·분석 결과 및 재발 방지 대책 보고서 갈무리


임 소방교가 소방호스를 잡은 위치도 적절하지 않았다. 소방청 표준작전절차(SOP)는 낙하물·붕괴 위험에 대비해 건물 높이만큼 안전 구역을 설정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SOP에 따라 감귤 창고 출입구 전면에서는 3.2m 이상, 측면에서는 4.5m 이상 떨어져 진압 활동을 해야 한다.

임 소방교는 처마 바로 아래인 1.8m 지점에서 물을 뿌리다 숨졌다. 당시 창고 지붕이 모두 타면서 벽만 남아있어 붕괴 위험이 컸다. 미국의 경우 화재를 진압할 때 벽체 높이의 1.5배 이상 안전거리를 확보하도록 한다.

이런 유형의 사고가 처음도 아니었다. 1997년 10월 전북 정읍의 한 마을 농협창고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에서 불을 끄던 소방관이 무너진 콘크리트 구조물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다. 당시 사고도 창고 처마 구조물이 붕괴하면서 발생했다.

일선 소방관들은 구급대원으로 화재 진압 경험이 부족한 임 소방교가 건물 벽 붕괴 가능성을 미처 예측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화재 진압 대원은 가스나 위험물 분석, 화재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전술적 지식을 습득한다.

대구지역 한 소방관은 “진압대원도 일주일만 손을 놓으면 현장이 낯설게 느껴진다”며 “구급과 진압의 업무는 완전히 다르다. 구급 업무 숙달에도 정신이 없는데 화재 진압 관련 지식까지 완벽히 익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구급대원’ 임 소방교는 ‘준 진압대원’으로 화재 진압 활동을 병행했다. 제주소방본부는 구급대원에게 화재 진압을 위한 별도 수당과 장비도 지급한다.

임성철 소방교 영결식은 지난해 12월 5일 제주시 한라체육관에서 열렸다. 동료 소방관들이 영정과 관을 들고 영결식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연합뉴스


규정에 없는 일이다. 사고조사단은 구급대원을 현장에 투입해 화재진압을 하도록 하는 표준화된 절차나 지침은 없다고 밝혔다.

당시 건물 붕괴 가능성이나 폭발 위험성 등 화재진압 활동 중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위험성을 진단하는 현장안전점검관도 없었다. 현장점검관은 임 소방교가 사고를 당한 이후 도착했다.

제주소방본부는 사고 이후 현장 지휘관 중심의 지휘 체계를 확립하고 ‘선 위험성 판단, 후 활동’ 원칙을 마련했다. 안전관리 전담조직을 신설하고 현장안전담당 지정 및 역할을 강화할 수 있도록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고인홍 전공노 제주소방지부 사무국장은 “운전대원은 펌프차 조작을 해야 하니 빠지고 지휘관 1명과 진압대원 1명이 남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라면서 “결국 구급대원까지 화재 진압에 동원하는 것으로 근본 대책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행정보다 구조·구급·진압 분야에 인력을 우선 배치해야 한다. 더는 젊은 소방관을 영웅으로 만들어 가족의 품을 떠나게 해선 안 된다”라고 말했다.

임 소방교 아버지는 아들 영결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들의 희생과 청춘이 밑거름돼 동료들이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 된다면 저희 가족은 그것으로 만족하고 아들의 숨결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겠습니다.”

제주시 한라체육관에서 지난해 12월 5일 열린 임성철 소방장 영결식에서 운구를 맡은 동료들이 유해를 앞에 두고 슬퍼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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