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가장 보통의 사건
게티이미지뱅크

“버티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이유로 회사가 저를 고발했다는 사실은 너무 충격이었습니다.”

지난 2022년 1월, 부처 산하 공공기관에 재직 중인 이아무개씨는 동료 4명의 증언을 취합해 상사 김아무개씨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했다. 신고서에는 1년 10개월간 김씨의 괴롭힘과 폭언에 시달린 직원들의 진술과 녹취 속기록 등이 포함됐다. “아침마다 눈 뜨기 겁 난다”, “지옥으로 끌려가는 기분”이라는 일기 내용과 한 동료의 정신과 상담 기록도 제출됐다. 피해자들이 고군분투한 끝에 같은 해 4월, 김씨는 경고 처분을 받게 됐다. 이씨의 증언에 따르면 “솜방망이 처벌과 업무상 보복이 두려워 용기를 내지 못한 피해자들의 진술을 모아” 얻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신고의 대가는 가혹했다. 김씨는 이씨가 직장 내 괴롭힘을 증명하기 위해 제출했던 녹취록을 문제 삼았다. 2021년 12월 김씨가 사무실에서 부하직원과 대화를 나누며 욕설을 하자, 이씨는 이를 녹음해 괴롭힘의 증거로 제출한 바 있었다. 김씨는 대화의 당사자가 아닌 이씨가 “불법 녹음을 했다”며 회사에 이씨를 형사고발하게 했다.

2022년 10월 고발을 시작으로 경찰 조사와 법정 싸움은 1년하고도 6개월간 이어졌다. 이씨는 “힘든 시간이었다”며 “같은 장소에서 일하는데 회사는 분리 조치도 해주지 않아 곤혹스러워하는 직원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씨를 더 힘들게 했던 건 이씨와 동료들이 김씨를 신고하기 위해 제출한 자료들이 이씨 고발 자료로 이용됐다는 점이다. 이씨는 “어떻게 보면 저는 회사를 믿고 (직장 내 괴롭힘을 증명하는) 신고서를 제출했는데, 그 신고서가 저를 고발하는 증거 자료로 활용됐다는 점에 상당히 배신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이씨를 겨냥한 재판이었지만 막상 진행 과정에서는 김씨의 괴롭힘 행위에 대한 증언들이 나왔다. 신고자 중 한 명이었던 ㄱ씨는 “김씨의 위압적이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여 모멸감을 느꼈다. 우울증, 불안장애에 자해 충동이 커졌다”며 “(직장 내 괴롭힘 신고 후) 뭔가 달라질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런 게 없었고, (신고자들에게) ‘너희는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등 협박성 발언을 했다”고 밝혔다.

법원은 최종적으로 이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지난달 2일 대구지법 형사11부(재판장 이종길)는 이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는데, 참석한 배심원 7명도 모두 이씨를 무죄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이 사건의 대화가 ‘타인 간의 대화’에 해당한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김씨가 한 욕설이 “사무실에 있는 누구라도 들으라고 이야기한 것에 가깝게 느꼈다”는 동료직원의 진술과 “실제 사무실의 구조와 크기, 이씨 자리에 설치된 파티션의 높이 등을 고려해 이씨가 김씨의 발언 내용을 충분히 들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상사의 괴롭힘에 대항한 오랜 싸움과 자신의 무죄까지 증명해야 하는 과정에서 이씨의 심신에는 보이지 않는 상흔이 남았다. 하지만 이씨는 또 다른 신고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는 “회사에서 김씨에게 저희 녹취록과 신고서 등 자료를 제공한 것은 근로기준법 위반이라는 법적 자문을 받았다”고 밝혔다. 계속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는 동력에 대해 이씨는 “동료들이 응원하고 있고, 회사 분위기 자체가 고충을 입 밖으로 냈다가 불이익을 받을까봐 억압되어 있다. 이런 상황은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겨레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20987 ‘블랙페이퍼’에서 ‘검은 반도체’로…김은 어떻게 금(金)이 되었나 랭크뉴스 2024.05.18
20986 文 "한·미훈련 중단, 美 싱가포르 선언에 명문화했어야" [文 회고록] 랭크뉴스 2024.05.18
20985 유족 "딸 시신 부패하는데"…거제폭행男 35일 지나 영장 왜 [사건추적] 랭크뉴스 2024.05.18
20984 [사설] 국민 눈높이에 한참 못 미친 공수처장 후보 랭크뉴스 2024.05.18
20983 美 다우지수 첫 40,000선 돌파 마감…금값도 2천400달러대로(종합) 랭크뉴스 2024.05.18
20982 美뉴욕증시 다우지수 4만선 마감…‘역대 최고’ 기록썼다 랭크뉴스 2024.05.18
20981 ‘텐프로’ 룸살롱 간 김호중…“술 마시던데” 진술 확보 랭크뉴스 2024.05.18
20980 여성 대상 범죄 계속되는데…살인자 ‘그녀’의 악마성만 부각[위근우의 리플레이] 랭크뉴스 2024.05.18
20979 코드네임 '문로드'…'문재인-김정은' 정상회담 위해 국정원, 은밀히 움직였다 랭크뉴스 2024.05.18
20978 워싱턴 중심에 한국 작가의 ‘전복적’ 기념비…K미술, 미 대륙을 홀리다 랭크뉴스 2024.05.18
20977 두 돌 아이가 1분 사이 사라졌다… 43년의 기다림 "살아만 있어다오" 랭크뉴스 2024.05.18
20976 '완전 이별 조건 120만원' 받고도 10대 여친 스토킹·폭행 20대 랭크뉴스 2024.05.18
20975 “국과수 ‘김호중 사고 전 음주’…소변 감정 결과 통보” 랭크뉴스 2024.05.18
20974 5ㆍ18민주화운동 44주년…이 시각 국립5ㆍ18민주묘지 랭크뉴스 2024.05.18
20973 [지방소멸 경고등] 그 많던 '5월의 신부'는 어디에…쇠락한 광주 웨딩의 거리 랭크뉴스 2024.05.18
20972 ‘횡령’ 형수 1심 무죄…박수홍, 친형 항소심 증인 선다 랭크뉴스 2024.05.18
20971 국민연금, 그래서 어떻게 해?[뉴스레터 점선면] 랭크뉴스 2024.05.18
20970 은퇴 후 폴댄스 빠져 매일 연습…'국가대표' 된 中 할머니 랭크뉴스 2024.05.18
20969 5ㆍ18민주화운동 44주년…이 시각 국립5·18민주묘지 랭크뉴스 2024.05.18
20968 "5·18 정신, 헌법에"‥이번엔 가능할까? 랭크뉴스 2024.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