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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 보수세력이 해야 할 일은, 내 식구 감싸기에 연연해서 국가 대사를 그르치고 거부권을 남발하는 대통령의 독단과 독주를 멈춰 세우는 일이다. 더 이상 ‘국민의 격노’를 사지 않도록 만류해야 한다. 브레이크 없는 저돌적 어퍼컷은 파국을 자초할 뿐이다.
지난달 25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여의도 당사에서 ‘제22대 총선이 남긴 과제들’ 주제로 여의도연구원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틀튜브 중독을 극복한다.” 총선 개표방송이 있던 날, 보수 논객 정규재씨가 유튜브 생방송에서 제시한 ‘보수 행동지침’ 열가지 중 첫번째 항목이다. 유튜브 채널 ‘정규재 티브이(TV)’의 진행자로 지난 탄핵 국면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단독 인터뷰를 하기도 했던 그가 노년층을 비하하는 ‘틀딱’(틀니딱딱)이라는 용어와 합성한 ‘틀튜브’로 보수 유튜브를 지칭한 것부터 파격이다.

그는 이번 총선에서 보수 유튜브 논객들이 ‘우리가 잘하고 있다. 국민의힘이 압승할 거다’와 같은 근거 없는 망상을 유포해 민심의 흐름을 직시하지 못하게 했다고 일침을 놓았다. ‘보수 10대 지침’ 가운데는 ‘부정선거, 5·18 북괴군 특파설과 같은 음모론에서 벗어난다’ ‘자신 속에 권위주의적 세계관을 벗어던진다’와 같은 항목도 있다. 시대착오적인 음모론을 내세우며 거드름을 부리는 자세로는 보수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보수가 망하면 진보가 승리할까? 보수궤멸론이 진보필승론일 수 없다는 점이 지금 한국 정치의 슬픈 현실이다. 22대 총선은 ‘정권 심판론’ 대 ‘이·조 심판론’의 대결이었다. 결과는 정권 심판론이 우세했음을 보여준다. 정부 여당이 보여준 무능과 독선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표로 집결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의 표심을 야당에 대한 신뢰와 지지로 등식화하기는 어렵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가 조국 사태로 상징되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불만 표출의 ‘도구’로 쓰였듯이, 이번 총선에서는 윤석열의 대척점에 있는 이재명과 조국이 유권자의 ‘도구’로 쓰였다. 도구는 임시적이고 가변적이다.

한국갤럽이 지난달 23~24일 벌인 조사에 따르면 대통령에 대한 긍정평가는 24%에 머물고 부정평가는 65%에 달한다. 총선 이후에도 대통령 지지도가 하락해 역대 최저 수준을 맴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당 지지도에서는 국민의힘 33%, 민주당 29%, 조국혁신당 13% 순으로 여전히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오차범위 내에 있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조)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을 바라는 일각의 시나리오는 이런 면에서 매우 위험하다. 윤석열에 대한 반대표의 집결이 언제든 이재명이나 조국에 대한 반대표의 집결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국민의힘이 보수를, 민주당이 진보를 자처할 만큼 명확한 철학적 전략적 비전의 차이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보수와 진보의 길항관계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보수가 품격을 잃고 원천적 가치를 부정하면, 진보의 질도 동반 하락한다. 건강한 보수는 애국과 질서를 중시하고 공과 사를 구분하며 자유와 책임을 강조한다. 그런 보수가 있어야 건강한 진보를 가려내는 일도 수월해진다. 보수가 살아야 진보도 산다.

총선 이후 민주당이 공세를 취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래도 문제 해결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대통령과 국민의힘이다. ‘채 상병 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한 뒤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채 상병의 죽음을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하려는 나쁜 정치”라고 성토했다. 대통령이 다시 열번째 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애국적 보수라면 이런 상황을 좌시해선 안 된다.

특검법이 통과될 때, 해병대예비역연대 회원 20여명은 국회 단상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거수경례를 했다. 이들은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우리는 정권 퇴진 선봉에 설 것”이라며 “사단장 한명을 구하려고 국가를 흔드는 게 어떻게 보수냐”고 성토했다. 그들을 통해 보수의 품격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규율과 질서, 정직과 신의, 부하에 대한 무한책임, 애국심과 고결함.

지금 대한민국 보수세력이 해야 할 일은, 내 식구 감싸기에 연연해서 국가 대사를 그르치고 거부권을 남발하는 대통령의 독단과 독주를 멈춰 세우는 일이다. 더 이상 ‘국민의 격노’를 사지 않도록 만류해야 한다. 브레이크 없는 저돌적 어퍼컷은 파국을 자초할 뿐이다. 총선 표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스스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 9일 예정된 대통령 기자회견이 새로운 소통의 시작이 될지, 구태의연한 소탕의 호령이 될지 걱정스레 지켜본다.

“진정한 화(和)는 화(化)이어야 한다. 변화의 의지가 없는 모든 대화는 소통이 아니며, 또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소통이란 진정한 소통이 아니다. 상대방을 타자화하고 자기를 관철하려는 동일성 논리이며 본질적으로 ‘소탕’인 것이다.”(신영복 유고집,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중에서)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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