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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 남긴 유서만이 유일한 증거
내용 중 일부는 피해자 진술과도 달라
대법원 "허위 작성 가능성도 배제 못해"
서울 서초구 대법원. 한국일보 자료사진


스스로 목숨을 끊기 직전 과거 자신과 친구들의 범행을 밝힌 유서를 형사재판의 증거로 채택할 수 있을까. 유서가 범행을 입증할 유일한 물적 증거였고 유서 내용이 다른 정황 증거와 배치되었던 사건에서, 대법원은 '죽은 사람이 고의로 그렇게 썼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유서 작성자의 친구들에게 무죄 취지 판결을 했다.

7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성폭력처벌법상 특수준강간 혐의로 기소된 남성 3명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지난달 12일 사건을 원심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유서를 주요 증거 삼아 판단한 원심엔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의 수사는 2021년 3월 A씨가 남긴 유서에서 시작됐다. 유서엔 그가 중학교 3학년이었던 2006년 친구들과 함께 한 살 어린 여학생을 불러내 술을 마시게 한 뒤 성폭행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A씨는 유서에 "사건이 꼭 해결됐으면 좋겠다"는 사죄의 뜻도 담았다.

경찰은 이 유서를 토대로 A씨 동창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이 유서에 특정된 '여학생'을 접촉했더니, 그 피해자는 "당시 기억이 끊긴 채 집에 와보니 속옷에 피가 묻어 있어 산부인과를 다녀온 일이 있다"고 말했다. 사건을 건네 받은 검찰은 성폭행 범행이 있었다고 판단해 이들을 기소했다.

재판에서 검찰과 피고인 측은 유서의 증거능력을 두고 공방을 벌였다. 형사소송법상 작성자의 사망 등으로 법정에서 전문증거에 대한 진술을 직접 듣는 게 불가능한 경우에서는 해당 기록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작성됐다는 사실이 증명돼야만 증거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1심 결론은 무죄였다. 1심 법원은 △A씨가 장기간 우울증 치료를 받는 등 망상을 할 수도 있는 불안정한 심리상태였던 점 △피해자 진술과 진료 기록 등에 유서와 부합하지 않는 내용이 있는 점 △관련자 중 A씨만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유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봤다.

그러나 2심은 "유서 작성에 허위가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다"며 판단을 뒤집었다. 항소심 법원은 "A씨가 허위 내용으로 동찰들을 무고할 만한 동기가 없고, 오히려 스스로 범행에 대한 자책이나 후회 등으로 사건을 오랜 기간 기억하고 있었다고 봄이 자연스럽다"고 설명했다.

엇갈린 하급심 판결을 두고 대법원은 1심 논리가 옳다고 판단했다. A씨가 죽어 유서 작성 경위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유서를 결정적 증거로 볼 만큼 그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이유다. 시간이 흐르며 A씨 기억이 과장되거나 왜곡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봤다.

대법원은 "A씨가 참회보다 피고인들에 대한 형사처벌을 목적으로 유서를 작성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고, 그런 경우라면 진실만이 기재돼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면서 "피해자 진술과 배치되는 내용도 있어 (A씨에 대한) 반대신문이 가능했다면 거짓 진술 등이 드러났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한국일보는 한국기자협회 자살보도 권고기준 3.0을 준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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