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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피눈물 흘리는 피해자들
한 전세사기 피해자가 지난해 4월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전세사기·깡통전세피해자전국대책위원회 주최로 열린 윤석열 대통령 면담 요청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20년 1월 부산 서구 빌라에 전세보증금 9500만원으로 입주한 노정윤(29)씨는 지난해 6월 전세사기를 당했다. 빌라엔 공동담보로 근저당 24억원이 설정돼 있었다. 부동산 중개인은 계약 당시 “임대인이 건물 부자라 문제없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무자본 갭투기’로 9개 건물에서 임대사업을 벌여온 최모씨는 부동산 경기가 나빠지자 상환 능력을 상실했다. 최씨가 통신사 요금을 체납해 빌라 내 40가구의 인터넷도 끊겼다. 임차인들은 엘리베이터에 보증금을 떼였다는 대자보를 붙였다.

노씨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입주한 것 아니냐’는 시선이었다. 법률 상담차 만난 법무사는 “근저당 있는 것을 알면서 왜 들어갔느냐”고 타박했다. 노씨는 “내 잘못인가”라고 생각했다. 임차인들은 2022년 말 차례로 최씨를 형사 고소했다. 수사 초기 담당 경찰은 집값 폭락으로 전세가가 높아져 발생한 단순 ‘깡통 전세’ 아니냐고 반응했다.

자책하던 노씨는 임대인을 엄벌한 1심 판결에서 위로를 받았다. 지난 1월 부산지법 동부지원 형사1단독 박주영 부장판사는 세입자 229명에게 180억원을 돌려주지 못한 최씨에게 검사가 요청한 징역 13년보다 높은 15년을 선고했다. 이는 사기죄 법정 최고형이다. 박 부장판사는 피해자들에게 “절대로 자신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말라”며 “탐욕을 제어하지 못한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여러분 같은 선량한 피해자를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부장판사의 발언은 피해자들에게 큰 위로가 됐다. 노씨는 5일 “이전에는 왜 그런 집에 들어갔느냐, 왜 더 안 알아봤느냐는 인식이 팽배했고, 기사에도 들어간 사람 잘못이라는 댓글이 많았다”며 “그런 프레임 속에서 너무 큰 고통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법원에서 판결을 통해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인정해줘 너무나 감사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는 “진짜 어른이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고 했다.

윤석열정부는 전세사기를 ‘약탈범죄’로 규정하고 강경 대응해왔다. 지난해 6월 전세사기특별법도 시행됐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의 삶은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선구제 후회수’ 방식의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 처리에 희망을 걸고 있다. 지난 2일 야당 주도로 본회의에 부의되면서 21대 국회 내 처리 가능성이 커진 상태다.

지난달 노씨 전셋집은 경매로 넘어갔다. 근저당 24억원, 임대인의 체납 세금, 노씨의 보증금이 주택임대차보호법 시행령상 최우선 변제금 요건인 8500만원 이하를 넘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노씨는 보증금 9500만원을 한 푼도 회수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민사소송 없이 범죄로 발생한 물적 피해를 배상받을 수 있는 배상명령은 지난 1월 법원에서 각하됐다. 피해자마다 근저당 유무, 최우선 변제금 해당 여부 등이 달라 피고인의 배상 책임 범위가 불명확하다는 게 이유였다.

전세사기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과 일상을 송두리째 삼켜 버렸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정모(38)씨는 2022년 1월 전셋집을 보증금 9000만원에 계약했다. 회사 사무실이 서울에서 인천 중구로 이전하면서 직장을 따라 이사했다. 전셋집엔 근저당이 1억2600만원 잡혀 있었고, 전세보증보험 가입이 불가능했지만 공인중개사는 “임대인이 다른 건물도 있고 부자라 괜찮다”며 안심시켰다. 정씨는 계약 5개월 만에 법률사무소로부터 집이 경매로 넘어간다는 우편물을 받았다. 계약한 임대인은 ‘바지 임대인’이었다. 실소유주 ‘건축왕’ 남모씨는 2022년 1월 이미 재산세 체납액이 3억7000만원에 달했다.

지난 1월 인천지법 형사1단독 오기두 부장판사는 191명에게 전세사기를 친 남씨에게 징역 15년과 범죄수익금 115억5800만원 추징을 선고했다. 사기죄 법정 최고형이 선고됐지만 정씨의 삶은 회복되지 않았다. 평생 일해 모은 1800만원은 증발했고, 갚아야 할 전세자금 대출 7200만원이 남았다. 남씨를 상대로 민사 소송을 진행 중이지만 남씨 수중에 자금이 없어 반환 가능성은 작다.

근무하던 회사는 정씨를 업무에서 제외해 주는 등 배려했다. 하지만 회사에 폐를 끼치는 것 같았고 정신적 어려움도 겹쳤다. 전세사기로 미추홀구에서만 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가운데 정씨가 피해자 모임에서 만난 지인도 있었다. 정씨도 심적 고통이 컸다. 업무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어 평생 직장이라고 생각했던 회사를 지난해 5월 그만뒀다. 현재 퇴직금과 구청의 생계비지원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4년 정도 돈을 모아 내 집을 마련하려 했던 꿈도 무너졌다.

지난해 6월부터 시행 중인 전세사기 피해지원 특별법도 정씨에겐 큰 도움이 안 됐다. 특별법은 피해 세대 경·공매 유예, 피해자에게 경·공매 우선매수권 부여, 전세자금 저리대출 등으로 구성됐다. 문제는 보증금 손실을 피해자가 모두 떠안아야 한다는 점이다. 정씨는 이 법을 통해 경매는 미뤘지만 전세대출 빚 7200만원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정씨는 “몸과 마음이 다 지쳤고, 직장생활도 더 못할 것 같다”며 “여전히 지옥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남씨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는 엄마에게 “빚 1억원이 생겼는데 남자친구를 사귀면 이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전세사기 피해자는 정씨처럼 경제적으로 취약한 ‘2030 청년층’에 집중돼 있다. 국토교통부 전세사기피해지원단 발표 자료를 보면 정부가 지난 17일까지 특별법에 따른 피해자로 인정한 1만5433명 가운데 73%(1만1375명)가 40대 미만 청년층이다. 사실상 전 재산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게 되면서 미래 계획도 흔들리고 있다.


A씨(34)는 2017년 8월 경북 경산시 사동 전셋집에 남편과 함께 입주했다. 2년만 살고 분양받은 아파트로 이사할 생각이었다. 이사를 7개월 앞두고 첫째 아이도 태어났다. 하지만 임대인은 보증금 등 1억5600만원을 돌려주지 않았다. 임대인은 지난 1월 징역 3년을 선고받았지만 A씨 삶은 무너졌다. A씨 부부는 이사를 포기하고 5살, 1살 된 아이와 함께 사기당한 18평 전셋집에서 버티고 있다. 전세대출은 한 달에 60만원씩 30년간 갚아야 한다. A씨는 “행복한 나날을 꿈꾸고 있었는데 세상이 나를 끝으로 내모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며 “자책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민사 소송을 해도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A씨는 “변호사비 수백만원을 들여 민사 소송을 진행했다가 돈을 더 잃기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2017년 부산 부산진구 6평짜리 원룸에 보증금 7000만원에 입주했던 B씨(34)의 임대인은 보증금을 반환하지 않고 잠적했다. B씨는 원룸에 발이 묶였다. 지난 1월 임대인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지만 B씨의 피해 복구엔 도움이 안 됐다. 설상가상 예비신랑까지 다른 지역에서 전세사기를 당했다. 당장 방법이 없어 사기당한 원룸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해야 할 형편이다. B씨는 “10년 동안 열심히 살며 모은 돈으로 원룸에 들어간 결과가 이렇게 되니 솔직히 너무나 막막하다”고 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보증금을 회수하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과 무기력감에 휩싸여 있다. 임대인들은 변제 능력이 없다고 버티고, 전세사기 특별법엔 보증금 피해 변제안은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도시연구소와 주거권네트워크가 지난해 10월 발표한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 가구 실태조사’를 보면 전세사기 피해 가구 약 52%가 보증금을 전액 회수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이모(33)씨는 경북 경산시 사동의 전셋집에 2017년 10월 예비신랑과 함께 입주했다가 보증금 8000만원을 떼였다. 징역 3년을 선고받은 임대인은 도박과 비트코인으로 전 재산을 탕진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9월 경매에서 낙찰된 전셋집에서 쫓겨난 이씨는 20년간 전세대출 5600만원을 갚아야 한다. 전셋집에는 1억원에 달하는 근저당이 있었고, 보증금은 최우선 변제금 요건 5000만원을 넘는 탓에 전액 환수하지 못했다. 만져보지도 못한 돈이 공중분해된 것이다. 날린 돈 탓에 태어난 아이에게 잘해줄 수 없어 미안할 따름이다. 이씨는 “전 재산을 잃은 피해자들이 목숨을 끊는 일이 반복되는 사회적 재난 상황 아니냐”며 “정부가 피해자들을 더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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