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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익의 노래로 보는 세상] 나훈아 ‘영영’
나훈아. 예아라∙예소리 제공


나훈아가 은퇴를 선언했다. 아무리 박하게 점수를 줘도 우리 가요사에서 열 손가락 안에는 넉넉하게 꼽힐 가수다. 무려 1960년대부터 활동하면서 숱한 히트곡을 남긴 대중가수이지만, 그의 최근 모습만 본 젊은 세대에겐 신비주의에 가려진 존재이기도 할 터. 남진과 나훈아 라이벌 구도에 초점을 맞춘 칼럼을 7년쯤 전에 쓴 적이 있는데, 오늘은 의외로 많은 이들이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나훈아의 이면을 들춰볼까 한다.

라이벌로 비교되던 나훈아와 남진. 한겨레 자료사진

흙수저 출신이다? 틀린 말이다! 상당한 재력가이자 국회의원까지 했던 아버지를 둔 남진과 비교당하면서 나훈아는 가난한 집안 출신인 것처럼 알려졌는데 실제로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그가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선원 출신으로 무역업을 한 아버지 덕분에 1950년대에 집에 축음기가 있었고 형과 함께 부산에서 서울로 유학을 올 수 있었다. 아버지는 꽤 공부를 잘했던 아들이 의사나 판검사가 되기를 기대했는데 허락도 없이 가수로 데뷔하자 대노하였고 죽는 날까지 용서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이룬 나훈아에게도 아버지에게 끝내 인정받지 못한 일만큼은 천추의 한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나훈아는 ‘뽕짝’ 가수다? 맞는 말이다! 흔히 뽕짝이라는 표현에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는데, 나훈아는 스스로 뽕짝 가수라고 주저 없이 단정 짓고 틈만 나면 뽕짝이라는 장르를 찬양했다. 뽕짝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을 담고 있는, 가장 한국적인 음악이라는 이유에서다. 한가지 더 얹자면, 어릴 때 그의 장래 희망은 클래식 성악가였다고 한다.

은퇴를 선언하고 마지막 투어 중인 나훈아. 예아라∙예소리 제공

싸움을 잘한다? 매우 그렇다! 그는 인터뷰에서 싸움 실력을 종종 언급했다. 폭력 사건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적도 일곱번이나 있다고. 그 옛날 공연장에는 종종 ‘건달’들이 몰려와 여성 관객을 희롱하고 가수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는데, 나훈아는 참지 않고 싸웠다고 한다. 왼쪽 뺨에 남아 있는 큰 흉터도 깨진 병을 들고 덤빈 괴한과 싸우다가 다쳐 무려 70바늘 넘게 꿰맨 흔적이다. 이 현장을 직접 목격한 방송인 이상벽은 실제 상황이 아닌 무대 연출인 줄 알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참고로 그때 나훈아는 결국 괴한을 자기 손으로 제압했다. 정말이지 활극의 시대였다. 일본 공연에서는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대놓고 말해 일본 우익의 협박을 받은 일도 있는데 나훈아는 경상도 사투리로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직일라믄 직이삐라”(죽이려면 죽여 봐).

나이를 속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프로필상에는 1947년생이라고 되어있는데 그와 함께 학교에 다닌 1951년생들이 여럿 있다. 특히 서라벌 고등학교에서는 노래 솜씨로 유명했다는 동창들의 추억담도 있다. 다만, 어려 보이기 위해 나이를 실제보다 적게 표기한 게 아니라 학생 신분으로 데뷔하면서 오히려 나이를 올려 표기한 것이 지금도 프로필 나이로 유지되는 것으로 보인다.

나훈아. 예아라∙예소리 제공

곡을 쓸 줄 모른다? 정반대다! 놀랍게도 노래방에 가장 많은 곡이 등록된 작곡가가 바로 그다. 무려 800곡이 넘는 노래를 작곡하고 등록했다. 노래를 불러 음원으로 등록한 곡은 2000곡이 넘는다. 쉬지 않고 매년 10곡씩 음원을 발표해도 200년이 걸리는데? 과연 이 기록을 깰 가수가 앞으로 나올 수 있을까? 이 글을 쓰면서 ‘히트곡’이라고 할 만한 노래는 얼마나 있는지 세어보았는데 20곡까지 세다가 너무 많아서 포기했다. 자기가 만든 노래는 직접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다른 가수에게 줘서 히트한 노래도 여럿 있다. 강진의 ‘땡벌’, 이자연의 ‘당신의 의미’, 심수봉의 ‘여자이니까’ 등이 나훈아가 만든 노래. 특히 ‘땡벌’은 후배 가수를 위해 편곡까지 직접 해주며 돈도 받지 않았다고, 당사자인 강진이 미담을 밝힌 적 있다.

이 밖에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들. 그는 서울에 오기 전까지는 야구 선수로도 뛰었다. 1951년 동갑내기 한국야구위원회(KBO) 허구연 총재가 부산 이웃 학교에서 함께 선수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의 초대를 거절했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건희 회장의 부름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는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대중 앞에서만 노래하니까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표를 끊어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초청도 거절했다. 2018년 남북평화 협력기원 평양 공연 때 일이다. 정치계 입문 권유도 거절했다. 그림과 서예에 상당한 조예가 있다. 이미 몇년 전에 은퇴를 예고했고 결국 실행에 옮겼다.

마지막으로, 그는 가황이라는 거창한 별명을 싫어했다. 하지만 온종일 그의 노래를 들으며 파란만장한 생애를 훑어본 나로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최고의 가수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여러 얼굴이 떠오르지만, 가황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가수는 오직 나훈아뿐이라고.

단호하게 이별을 고하고 떠난 그를 향한 팬들의 마음이 꼭 ‘영영’의 노랫말 같지 않을까? “잊으라 했는데 잊어달라 했는데/ 그런데도 아직 난 너를 잊지 못하네.”


에스비에스 피디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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