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이현상 논설실장
“도덕이 무력해진 선거.”

총선이 끝나고 나간 모임에서 보수 성향의 지인이 울분을 토했다. 이해가 간다. 어려운 중소 자영업자가 받아야 할 돈을 주택 구입용으로 불법 대출받은 후보가 너끈히 당선되는가 하면, 입에 담기 어려운 성적 발언을 떠벌리던 ‘역사학자’도 국회에 입성했다. 대장동·백현동 사건, 공직선거법 위반, 위증 교사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오히려 굳건한 방탄성을 쌓았다. 민주당의 도덕적 문제들이 ‘이채양명주’(이태원, 채 상병, 양평 고속도로, 명품 백, 주가 조작 의혹) 주문 앞에서 묻혀 버리고 말았다는 한탄이 나올 법하다.

인구학적 지형 보수에 불리하지만
선거는 여러 변수 얽힌 역동적 과정
창의적 전략과 외연 확대가 더 중요
육참골단의 각오로 변신 도모해야

이런 무력감은 급기야 정치인구학적 지형이 보수에 점점 불리해지고 있다는 분석에까지 이른다. 보수 정당의 강력한 지지세력인 고령층의 퇴장은 빨라지는데, 새롭게 고령층에 편입되는 86세대는 기존의 ‘반(反)보수’ 성향을 그대로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굳건한 기반인 4050세대에 이어 60대마저 친(親)진보 세대가 된다면 보수 정당의 입지는 점점 좁아진다. 보수 정당에는 그야말로 ‘지옥의 문’이 열리는 셈이다.

그렇다고 보수는 지옥의 입구에 쓰여 있다는 문구처럼 ‘모든 희망을 버려야’만 되나. 정치인구학적 결정론이 지배한다면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선거는 반드시 구조적 요인에 좌우되지 않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좋은 예가 미국 선거다.

인구 구성으로 봤을 때 미국 대선의 운동장이 민주당에 유리하게 기울어지고 있다는 분석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20년 미국의 백인 인구는 57.8%였다. 10년 전 63.7%에서 보듯 비중이 계속 줄고 있다. 반면에 히스패닉(16.3→18.7%)과 아시아계(4.8→6%)는 늘고 있다. 흑인 비중(12.6→12.4%)은 거의 변화가 없다. 미국은 투표행위에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가 비교적 작동하는 나라다. 정체성 정치란 인종·성·종교·지역 등 여러 기준으로 분화된 집단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하는 현상을 말한다. 정체성 정치는 한국에서는 지역주의 외에는 뚜렷한 사례를 찾기 힘들지만, 미국에서는 꽤 많이 적용되는 분석 틀이다. 2008년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오바마는 이런 정체성 정치를 잘 이용한 케이스다. 오바마는 흑인, 히스패닉, 아시아계 등 소수 인종을 중심으로 백인 대졸자, 미혼여성, 젊은 층으로 지지층을 넓혀 당선됐다. 일종의 ‘유권자 연합’ 전략이었다.

그러나 인구 구성 변화만 보면 2016년 백인 우월주의자 트럼프의 당선은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오바마 때보다 분명 백인의 비중은 줄었기 때문에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트럼프가 선택한 전략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박탈감에 시달리는 백인 중산층과 노동자층의 결집이었다. 그 전략이 정체성 정치의 또 다른 부정적 면모를 낳았지만, 어쨌거나 트럼프는 성공했다. 트럼프의 ‘도덕’을 논하자는 게 아니다. 트럼프의 ‘전략’에 주목했을 뿐이다. 그 후 8년이 지난 현재, 백인 인구 비중이 더 줄었음에도 트럼프는 여전히 바이든과 박빙의 대결을 펼치고 있다. 선거에서 정치인구학은 수많은 변수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이번 총선에서 불리한 정치인구학적 조건을 확인한 이상, 보수 정당의 전략은 지금까지와는 달라져야 한다. 객관적 조건을 상수가 아니라 변수로 만들려면 창의성과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정치 분석가들은 유권자 중 민주당 무조건 지지는 30%, 국민의힘 무조건 지지는 20% 정도로 본다. 결국 31%를 어떻게 더 확보할지가 보수 여당으로선 관건이다. 분명한 것은 부지런히 중도층으로 외연을 넓히는 전략 없이 ‘안보 보수’ ‘아스팔트 보수’에만 기대는 ‘유사 정체성 정치’로는 승산이 없다는 사실이다.

중도 외연 확장을 위해선 ‘선거 연대’ 같은 정치공학적 기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곪은 문제를 도려내 등 돌린 중도층을 되돌이키는 결단이다. 자기 살을 내주고 상대의 뼈를 끊는 육참골단(肉斬骨斷)의 자세가 절실하다는 이야기다. 김 여사 문제든, 채 상병 특검이든 잘라낼 ‘살’을 고민할 때다. 그 살을 아끼다가 병독이 뼈로 스며들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이거야말로 보수로선 지옥이다.

희망은 절망 속에서 싹튼다. 그리스 신화의 페르세포네는 죽은 자들의 세계인 명부(冥府)의 여신이지만, 씨앗의 신이자 봄의 신이기도 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총선 뒷수습을 하는 용산과 여당의 모습에선 하늘이 무너졌다는 위기감이 없어 보인다. ‘찐윤’ 원내대표 출마설이 나오는 게 그 예다. 개헌·탄핵 저지선 초과 8석이 잔해 더미를 받치고 있지만, 그 8석이 과연 끝까지 버틸지는 알 수 없다. 진짜 지옥의 문이 열리기 전에 A부터 Z까지 달라져야 한다.

중앙일보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12799 바이든·트럼프 후보 공식 지명 전 다음달 TV토론…“덤벼라” “준비됐다” 랭크뉴스 2024.05.16
12798 "우린 배송도 프리미엄" 명품 플랫폼 젠테, 물류에 힘 싣는다 랭크뉴스 2024.05.16
12797 뮤비 제작비만 5억, 앨범에 200억 써도 실패...K팝 '부익부 빈익빈' 심화 랭크뉴스 2024.05.16
12796 [속보] 신임 중앙지검장, 김 여사 수사에 "필요한 모든 조치" 랭크뉴스 2024.05.16
12795 정부 '국방의대' 설립 검토‥장기복무 군의관 확보 차원 랭크뉴스 2024.05.16
12794 '5월 맞아?' 설악산 40㎝ 눈 '펑펑'…아침까지 최대 5㎝ 더 내려 랭크뉴스 2024.05.16
12793 효성 차남 조현문 측 “유언장 여러 측면에서 납득하기 어려워” 랭크뉴스 2024.05.16
12792 [투자노트] 금리 인하 시그널엔 리츠를 보라 랭크뉴스 2024.05.16
12791 국민 절반 “정치성향 다르면 밥도 같이 먹기 싫어” 랭크뉴스 2024.05.16
12790 신상공개위 아직인데…태국 언론, '파타야 살인' 피의자 공개 랭크뉴스 2024.05.16
12789 [속보] 중앙지검장, 김여사 수사에 "지장 없게 필요한 모든 조치" 랭크뉴스 2024.05.16
12788 “층간소음 자제 부탁”…“그럼 개인 주택 살아야” [잇슈 키워드] 랭크뉴스 2024.05.16
12787 “단체 사진에 왜 우리 애 없냐”…두 달 뒤 보내온 협박 편지 [잇슈 키워드] 랭크뉴스 2024.05.16
12786 [속보] 신임 중앙지검장 “인사 관계없이 할 일 법·원칙대로 진행” 랭크뉴스 2024.05.16
12785 “불법 오토바이, 대포차 게 섰거라” 한 달간 집중단속 랭크뉴스 2024.05.16
12784 홍준표 "尹 상남자" 발언에 정청래 "아첨꾼의 하책 훈수질, 구닥다리 논리" 랭크뉴스 2024.05.16
12783 소속사 대표 "김호중, 술집 갔지만 술 안마셔…대리출석 내가 지시" 랭크뉴스 2024.05.16
12782 [진중권 칼럼] 이재명 유일 체제와 여의도 대통령 랭크뉴스 2024.05.16
12781 “전 여친 사망, 폭행이 원인”… 거제 가해자 구속영장 랭크뉴스 2024.05.16
12780 뉴욕증시, 금리인하 기대에 3대 지수 역대 최고 마감 랭크뉴스 2024.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