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빨갱이’ 아니라 입증하기 위해 자원입대
고문으로 만들어진 죄, 74년 만에 무죄
30일 제주지방법원에 나온 강순주(94)씨. 허호준 기자

“나는 나를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30일 오후 4·3 재심 재판이 열린 제주지방법원 20호 법정.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서 온 올해 아흔넷의 강순주씨의 목소리는 떨렸다. 강씨는 전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재판장 앞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70여년 전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중산간 마을 가시리의 마을 안길, 그 길에서 죽어간 친척, 6·25전쟁 시기 자원입대하던 때가 엊그제 같았다.

이날 법정에 나온 그의 목소리는 가끔은 물기에 젖어 떨렸고, 복받쳤지만 발음은 또렷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놨던 그 날의 기억의 편린들을 논리정연하게 끄집어냈다.

“저는 4·3사건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자랐기 때문에 우리나라 말도 제대로 못 했고, 풍속도 전혀 몰랐습니다. 게다가 민가가 있는 마을에서 1시간 정도는 가야 하는 변두리에 살았는데 길이 험하고 야간에는 통행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부모를 따라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 가시리로 돌아온 그는 마을에서는 꽤 떨어진 외곽지역 할아버지 집에서 살았다. 4·3 일어난 초기만 해도 4·3이 무엇인지 모르고 지냈다. 그런 그가 4·3을 겪은 것은 1948년 가을이었다.

가시리 마을이 중산간 마을인 데다 강씨는 마을에서도 외곽에 살아 바깥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다. 어느 날 길가에 죽어있는 종손을 목격했다. 겁이 났다. 몸을 숨겨야 했다. 마을이 불에 타고 마을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고 있다는 얘기도 들렸다. 피신생활을 하다 깜빡 잠이 들었고, 토벌대에 걸렸다. 총을 겨눈 군인 2명이 “도망가라”고 했다. 한참 지나 사정거리에서 멀어지자 그때야 공포를 쏘는 소리가 들렸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동네 사람과 함께 피신생활을 하다 경찰에 체포돼 제주읍내 농업학교에 수용돼 몇 차례 조사를 받았지만 풀려났다. 이제 더는 붙잡힐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강씨는 마을로 돌아와 농사를 짓다 다시 붙잡혔다. 1949년의 일이다. 이번에는 달랐다. 산지항(제주항) 앞에 있는 주정공장에 수용된 강씨는 모진 고문을 당하며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천장에 매달리고, 전기고문을 받았다. 카빈총을 눈앞에 들이대며 바른말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강씨는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았기에 하지 않았다며 끝까지 버텼다.

“저는 (경찰 조사 때)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인정하지 못합니다. 손도장을 찍으라고 했지만 못 찍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저를 죽여달라고 했습니다. 고문이 너무 심해 견딜 수 없어서 저를 죽여달라고도 했습니다.”

그는 1950년 5월 국가보안법 위반과 내란죄 위반 명목으로 금고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난 듯 강씨는 울먹였다.

30일 제주4·3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강순주씨. 허호준 기자

“제가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으면 그 원인이 있을 텐데 법정에 오기 전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재판을 받고 판사님 앞에 가서 판단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저에게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직후 전국적으로 예비검속의 바람이 몰아쳤다. 그는 그 바람을 그대로 맞아야 했다. 집행유예로 석방된 그는 마을에 있다가 예비검속돼 성산포경찰서에 붙들려갔다. 이번에는 진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비검속된 많은 제주도민이 학살되거나 바다에 수장돼 행방불명됐다. 그러나 당시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은 1950년 8월 말 계엄사령부의 예비검속자 총살명령 공문에 '부당함으로 미이행'이라고 쓴 뒤 명령을 거부하고, 200여명의 주민을 살렸다. 문 서장은 강씨의 생명의 은인이다.

절망의 끝에서 살아났지만 막막했다. 언젠가 또다시 끌려갈 것만 같았다.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이 내가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가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며칠 동안 눈물을 흘리며 생활하다가 지금 이북(북한)하고 싸움(전쟁)할 때니까 내가 군에 가서 죽는다면 내 결백이 증명되지 않을까 해서 지원했습니다.”

강씨의 발언에 방청석에 앉았던 이들도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훔쳤다. 강씨는 1952년 군에 입대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강씨는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세상이 내게 이럴까. 국가를 많이 원망도 했다”며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군에 가서 전사한다면 최소한 나의 떳떳함이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씨는 울먹이면서 말을 이었다. 그는 최전방을 지원해 전방에서 문제가 생기면 바로 투입되는 보충대대로 배속됐으나, 그곳에서도 그를 좋게 본 대대장을 만나 군 생활을 이어갔다.

제주4·3사건 직권재심 권고 합동수행단은 이날 강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구했고, 변호인도 강씨의 무죄를 요청했다.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재판장 방선옥)는 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한겨레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15951 국제결혼 韓남성 절반이 대졸…30%는 "월 400만원 이상 번다" 랭크뉴스 2024.05.23
15950 한미일 밀착에 한일중 정상회의체 복원…한중관계 개선도 주목 랭크뉴스 2024.05.23
15949 하반기 인하 열어둔 한은… 시장선 “덜 매파적이었다” 랭크뉴스 2024.05.23
15948 '1~2표 이탈?' 폭발한 김웅 "국민의힘 아니고 尹 내시집단" 랭크뉴스 2024.05.23
15947 수류탄 사고 훈련병 어머니 "남은 아이들 심리치료 신경써달라" 랭크뉴스 2024.05.23
15946 민주당 2만 명 탈당 행렬... "포기 말고 혼내달라" 만류 편지까지 쓴 이재명 랭크뉴스 2024.05.23
15945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5주기 추도식…시민도 여야도 한데 모여 랭크뉴스 2024.05.23
15944 공모주 뜨겁네… 노브랜드, 상장 첫날 거래대금 1위 랭크뉴스 2024.05.23
15943 경복궁 낙서 테러 배후 ‘이 팀장’ 검거…불법 사이트 운영자 [지금뉴스] 랭크뉴스 2024.05.23
15942 '간첩누명' 재일동포 50년만에 무죄…딸은 父 대신 펑펑 울었다 랭크뉴스 2024.05.23
15941 돌아갈 수 없는 ‘그 가정’…쉼터서도 내몰리는 ‘가정 밖 청소년’ [취재후] 랭크뉴스 2024.05.23
15940 유인촌 “안무 저작권 보호해야”…‘음반 사재기’ 조사 중 랭크뉴스 2024.05.23
15939 검찰, '김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 최재영 목사 출국정지 랭크뉴스 2024.05.23
15938 정부, 반도체 '쩐의 전쟁' 가세… 26조 투입·용인 산단 2030년 가동 랭크뉴스 2024.05.23
15937 “제발 꿈이었으면…” 수류탄 폭발 숨진 훈련병母 비통 심경 랭크뉴스 2024.05.23
15936 병원 떠나 생활고 겪는 전공의들…"생계지원금 1646명 신청" 랭크뉴스 2024.05.23
15935 “S커브에 올라탄 LG이노텍…LG전자는 ‘세계 100대 브랜드’ 진입 기대” 랭크뉴스 2024.05.23
15934 서울, 세계 1000대 도시 중 615위 그쳐...이유는 “공기 나쁘고, 극한의 날씨” 랭크뉴스 2024.05.23
15933 한일중 정상회의, 26~27일 서울서 개최…“3국 협력 복원 분기점” 랭크뉴스 2024.05.23
15932 친정에 칼 꽂은 삼성 前특허수장…"혐오스럽다" 美법원도 철퇴 랭크뉴스 2024.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