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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중증 지적장애인을 상대로 억대 소송 사기를 벌인 60대 성년후견인이 구속돼 재판에 넘겨진 가운데, 이 남성이 자신보다 24살 어린 피해자를 시설에서 빼내 결혼까지 시도한 정황이 확인됐습니다. 심지어 이 남성은 피해자의 형부입니다.

■ "24살 어린 처제가 결혼과 출산을 원한다"

30대 중증 지적장애인이 머무는 제주도의 한 장애인 거주시설.

지난 2022년 말 이곳에 60대 남성 이 모 씨가 찾아왔습니다. 이 씨는 장애인의 형부이자 성년후견인이었습니다.


시설 측에 따르면 이 씨는 당시 지적장애인의 주민등록증이 필요하고, 동사무소에 같이 가야 할 일이 있다며 외출을 요청했습니다.

시설 관계자는 "(이 씨가) 빨리 데려가서 처리해야 한다며 급한 모습을 보였고, 윽박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24살이나 어린 처제를 데려가겠다며 시설 측과 한동안 승강이를 벌인 겁니다.

결국, 중증 지적장애인은 이 씨와 외출했지만, 시설 담당자가 동행해 별다른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 씨가 시설에 두고 간 서류에서 충격적인 내용이 발견됐습니다.


'계약 결혼의 건'이라는 제목의 서류에는 처제가 가족들의 동의로 (자신과) 결혼을 원하고, 동거하면서 출산도 원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또 처제가 가정생활을 원해 계약 결혼을 원하고, 언니랑 같이 있기를 원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습니다.

KBS 취재 결과 피해 지적장애인의 언니 역시 중증 지적장애인입니다.

장애인 거주 시설 관계자는 "피해자가 장애인인데 계약 결혼에다가 임신까지 시킨다고 해서 너무 무서웠다"고 말했습니다.

이 씨는 지난해에도 여러 차례 피해자를 외출시키려 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취재진은 시설을 찾아가 담당자와 피해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동의를 얻어 피해자에게 형부가 어떤 사람인지 물었습니다.

피해자는 형부에 대해 '못돼 먹었다'고 말했고, 어떤 게 못돼 먹었는지 묻자 '속상하다'고 답했습니다. 피해자가 결혼과 출산까지 원한다는 계약서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반응입니다.

시설 측은 지난해 7월 제주도 장애인권익옹호기관에 이 사실을 신고하며 조사가 시작됐고, 이후 경찰 수사에서 이 씨의 소송 사기 혐의가 드러나게 된 겁니다.


이 씨는 동생 명의로 2021년 처제인 30대 지적장애인이 3억 원 상당의 돈을 빌렸다며 법원에 지급명령을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이 씨가 법원에 제출한 차용증과 변제각서는 허위였습니다. 서류로만 심사하는 법원의 독촉 절차인 지급명령 제도를 악용한 겁니다.

이 씨가 자신의 동생 이름으로 지급명령을 신청한 건 성년후견인인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 중증 지적장애인 언니 한 달 가까이 홀로 남겨져


한편 이 씨가 구속되면서 이 씨의 아내이자 피해자의 언니인 40대 중증 지적장애인 A 씨는 집에서 한 달 가까이 홀로 지내고 있던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KBS는 A 씨의 안전이 우려돼 장애인권익옹호기관과 함께 제주도의 한 외곽지에 있는 집을 방문했습니다.

1층 규모의 조립식 건물 옆에는 십자가가 달린 건물이 있었고, 마당엔 신발과 빨래 건조대, 페트병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대야엔 오랫동안 쓰지 않은 듯 물이 누렇게 고여있었습니다.


취재진은 A 씨의 동의를 얻어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거실엔 CCTV가 설치돼 있었는데, 카메라는 집 입구와 마당, 방 안 곳곳을 비추며 A 씨의 행동을 녹화하고 있었습니다.

처제의 재산을 빼앗으려 한 혐의로 남편이 구속된 이후 한 달 가까이 홀로 지낸 A 씨는 휴대전화도 없어 긴급할 때 도움도 요청할 수 없는 상태였고, 심지어 신분증과 복지 카드도 없었습니다.


중요 물품이 보관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고는 자물쇠로 잠겨 있었습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하루에 한 차례 방문하는 장애인 활동 보조사뿐입니다.

남편이 구속되기 전 A 씨의 삶은 어땠을까.

취재진은 주변 마을 주민들에게 A 씨의 생활에 관해 물었습니다.

주민 A
"새벽에 막 욕하고. 이유 없이 막 욕하는 소리지. 방에서 막 들려. 죽여버려 똑바로 할래 안 할래? 막 하고 그냥 막 다그치는 소리라."

주민 B
"(아내는) 밖에는 잘 안 나와. (남편은) 조금 (뭐라) 하면 고발이나 하려고 하고. 각시한테는 굉장히 욕을 해."

주민 C
"(아내에 대해) 이야기했다가 찾아가서 행패 부리다 보니까. 남의 사정에 왜 묻고 따지느냐고"

주민 D
"악성 민원인이세요. 그분이. 뭔가 하면 다 싸움만 하려고 하고, 동네 분들이랑 사이도 좋지 않으세요."

마을 안에서도 오랜 시간 고립돼 생활해 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취재진은 A 씨의 안전을 확보하고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해 장애인권익옹호기관 직원과 지역 면사무소를 찾았습니다. A 씨의 새 신분증과 복지카드를 재발급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면사무소는 A 씨가 홀로 지내는 동안 적극적인 지원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애순 맞춤형 복지팀장은 "배우자가 교정시설에 입소해 있고, 배우자 명의로 된 재산이나 토지에 대한 수익을 이 분(A 씨)이 사용할 여력이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며 "생계비를 받을 수 있도록 1인 가구 수급자 신청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수급자 신청이 오래 걸리면 긴급지원 생계비를 우선 신청하고, 맞춤형 복지팀에서 반찬 등을 지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KBS 취재 결과 이들 중증 지적장애인 자매의 아버지는 2011년 11월 실종됐고, 2017년 실종 선고로 사망 처리됐습니다. 실종 선고는 생사가 5년간 분명하지 않을 때 법원의 선고를 통해 사망으로 간주하는 제도입니다. 어머니 역시 몇 해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들 자매는 부모가 사망하면서 땅을 물려받았는데, 구속된 이 씨는 이들의 땅을 노렸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찰은 휴대전화 포렌식 과정에서 이 씨 형제가 범행을 공모한 것으로 보고 둘을 구속했지만, 동생 이 씨는 구속이 적합한지 등을 심사하는 법원의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났습니다.

검찰도 동생 이 씨의 공모를 인정하기엔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며 불기소 처분했고, 형 이 씨만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겼습니다.

형이 범행을 주도했고, 동생은 지급명령에 관여한 사실이 없다고 본 겁니다.

현재 장애인 거주시설에 살고 있는 피해자와 언니는 자신들에게 물려받은 땅이 있는지는 물론이고 자신들을 상대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 자매의 사건을 돕고 있는 장애인권익옹호기관은 추가 범행이 있는지 등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취재기자 고민주, 문준영
촬영기자 부수홍
그래픽 조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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