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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중증 지적장애인을 상대로 억대 소송 사기를 벌인 성년후견인이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이 남성은 서류로만 심사하는 법원의 독촉 절차인 지급명령 제도를 악용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민사소송 절차를 간소화하고, 신속성과 편의성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를 사회적 약자의 재산을 빼앗는 도구로 사용한 겁니다.
■ 22년 전 10대 중증 지적장애인이 3억 원을 빌렸다?

소송 사기 혐의로 구속된 성년후견인 60대 이 모 씨는 피해자인 30대 여성 중증 지적장애인의 형부였습니다.

이 씨는 자신의 친동생인 50대 이 모 씨의 이름으로 피해자가 2억 9,500만 원 상당의 돈을 빌렸다며 법원에 지급명령을 신청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인 2002년 피해자가 돈을 빌렸고, 2012년까지 돈을 갚겠다는 변제각서까지 썼지만, 여전히 갚지 않고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 씨는 동생 이름으로 2021년 법원에 지급명령을 신청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피해자가 돈을 빌렸다는 2002년 당시, 피해자의 나이는 17살에 불과했습니다.

10대 소녀가 3억 원에 달하는 돈을 빌렸다는 점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피해자는 차용증과 변제각서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었습니다.

■ "돈 빌린 사실 모르고 의사소통도 어려워"

취재진은 정확한 경위를 확인하기 위해 피해자가 살고 있는 장애인 거주시설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담당 사회복지사와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피해자에게 돈을 빌렸는지, 변제각서를 쓴 사실이 있는지 등을 물었습니다.


피해자는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힘들었고, 차용증과 변제각서에 대해서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담당 복지사는 "피해자의 지능은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이라며 "당시 미성년자가 이렇게 많은 돈을 빌렸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 피해자가 썼다는 변제각서, 필적 감정 결과 "다른 필체"

취재진은 피해자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종이에 적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가 쓴 글자가 변제각서의 필체와 일치하는지 전문가에게 필적 감정을 맡겼습니다.


전문가는 글자를 구성하는 점과 획인 자획의 구성과 형태, 위치, 길이와 비율 등을 비교한 결과 변제각서의 필체가 피해자의 것이 아니라는 감정 결과를 내놨습니다.

감정을 맡은 서한서 예일문서감정원 원장은 "차용증의 '차'자를 보면 피해자의 평상 시 필적과 차이가 크다"고 했고, "변제각서의 'ㅂ'을 쓸 때 1획, 2획, 3획, 4획으로 구성이 되지만, 피해자는 동그랗게 1획을 긋고 그사이에 획을 그어서 2획으로 구성하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서 원장은 "이 외에도 여러 전체적인 글자를 비교했을 때 다른 특징이 계속 관찰되고 있다"며 "중증 지적장애인이 변제각서를 작성했다고 보기 매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취재진이 이 씨가 허위로 차용증과 변제각서를 썼다고 판단한 근거입니다.

수상한 점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 씨는 피해자가 돈을 빌렸다는 근거로 건축자재를 구매했다는 견적서를 제출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그런데 이 씨가 제출한 견적서 날짜는 2000년도였습니다. 돈을 빌렸다는 2002년과 시점 자체가 다릅니다.

또 당시 10대 중증 지적장애인 소녀가 견적서에 기재된 것처럼 창고와 전기시설, 중창문 같은 건설 자재를 이 씨에게 요청할 이유 역시 납득 하기 어렵습니다.

■ 법원은 왜 지급명령을 결정했을까

그렇다면 법원은 무엇을 근거로 피해자에게 돈을 갚으라고 결정한 걸까.

제주지방법원은 해당 사건에 대해 차용증이 있으면 지급명령이 나갈 수 있고, 절차상 전혀 문제가 없다고만 밝혔습니다.


지급명령은 신속성과 편의성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로, 이런 사안은 극히 일부이며, 이의신청이나 청구이의 등 구제 방안도 마련돼 있다고도 설명했습니다.

제도 자체보다 이를 악용한 사람의 문제라는 취지입니다.

하지만 피해자가 이를 뒤집으려면 또다시 소송을 진행해야 합니다. 현재 피해자의 담당 변호사는 잘못된 지급명령을 바로 잡기 위한 소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중증 지적장애인인 피해자는 여전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송달 제도 보완…성년후견인 관리·감독 철저해야"

채무자는 지급명령 결정문을 송달받으면 2주 안에 이의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기간이 지나면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이 발생합니다.

이 씨는 지급명령을 신청하면서 피해자의 주소를 자신의 주소지로 기재했습니다.

당연히 시설에 있던 피해자는 이 사실을 알 수 없었고, 장애인 거주 시설 역시 이를 인지할 수 없었습니다.

피해자의 지급명령 결정 취소 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법무법인 현 김성훈 변호사는 "법원은 우편 송달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며 "송달이라는 제도는 가족이 받아도 도달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직접 당사자에게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요즘은 문자 메시지 등 연락 가능한 수단이 많아서, 이런 부분을 시스템으로 보완하면 지금과 같은 피해를 예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김 변호사는 또 "이번 사례처럼 성년후견인이 자기 명의가 아니라 가족 명의를 이용해 피해자의 재산을 은닉하려 하거나, 횡령, 절도 등이 이뤄지는 경우도 있어 성년후견인에 대한 철저한 관리· 감독도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구속돼 재판에 넘겨진 이 씨는 최근 성년후견인 지위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이 씨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상급 법원에 재차 판단을 요청했습니다.

취재기자 고민주, 문준영
촬영기자 부수홍
그래픽 조하연

[연관 기사]
[단독/탐사K] 지적장애인 상대 억대 소송사기 성년후견인 구속(2024.04.29)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95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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