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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대전에서 전세사기로 경매에 넘어간 한 다가구주택의 우편함. 전기요금 고지서 ‘받는 사람’ 난에는 임대인과 세입자 이름이 섞여 있다. 박수지 기자

“자연재해 같아요. 펀드나 코인에 투자했다가 실패하면 제 선택이 잘못됐다고 할 텐데, 전세제도와 공인중개사가 있는데 1억원 넘는 돈이 갑자기 0원이 됐으니까요.”

29일 대전의 다가구주택에 사는 박민호(31)씨는 자신이 겪은 전세사기를 자연재해에 비유했다. 그는 두번 연속 전세사기를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나마 첫번째 사기 땐 전세금 반환보증 보험을 통해 보증금을 돌려받았지만, 두번째가 문제였다. 지난해 10월부터 집주인이 연락이 닿지 않으면서 박씨는 보증금 1억2500만원을 날리게 된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다. 사연은 이렇다.

처음 전세사기를 당한 뒤 급하게 이사한 게 첫번째 화근이었다. 경매로 집을 사들인 집주인이 박씨에게 2주 만에 이사하라고 통보하면서 그는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구한 주택은 전세보증보험 가입이 어려운 다가구주택이었다. 전세대출보증보험 기관은 가입 희망자가 해당 주택에 거주하는 다수의 임차인과 보증금 등 임차 정보를 모두 제출할 때만 받아준다. 박씨는 “선순위 보증금 3순위”라는 부동산 중개인 말만 믿고 지난해 3월 이사했다.

보증금을 돌려받는 순번이 세입자 중 7번째라는 점은 전세사기를 인지한 지난해 10월에야 그는 알게 됐다. 해당 주택은 최근 경매에 넘어갔다. 경매가는 17억8천만원이지만, 11억4천만원에 이르는 근저당과 박씨에 앞선 세입자 보증금 정리를 염두에 두면 한푼도 건지지 못한다는 게 박씨의 계산이다.


전세사기 특별법 1년…다가구 17%는 사각지대

전세사기 특별법(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 제정 1년이 흐른 현재 여전히 박씨와 같은 다가구주택 세입자는 전세사기 피해에 노출돼 있다. 호실별로 소유주가 다르고 개별 등기가 이뤄지는 다세대주택과 달리 다가구주택은 최대 19가구에 세를 놓을 수 있지만 집주인은 1명이다. 그런 터라 호실로 별도 등기가 되지 않는다. 나아가 다가구주택은 경매에 넘어가면 집주인의 세금 체납 규모나 세입자들 간 순위에 따라 보증금 회수 여부가 결정된다.

문제는 전세 계약을 하기 전에는 세입자가 보증금 회수와 직결되는 임대인 세금 체납 정보와 선순위 보증금 규모를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계약 뒤에도 전입세대 열람과 확정일자 부여현황 등 다양한 서류를 뗀 뒤 종합해봐야 가늠할 수 있다. 계약을 중개하는 공인중개사들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란다.

대전 동구의 다가구주택 밀집 지역에서 사무실을 운영하는 공인중개사 ㄱ씨는 “세입자가 사기당하길 원하는 중개사가 어디 있겠느냐”며 “공인중개사에게 확정일자 등 물건에 대한 핵심 정보를 알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로선 선순위 관계를 알기 어려운 집은 중개 자체를 안 하는 게 상책”이라고 덧붙였다. 다가구주택의 전세사기 예방을 위해선 해당 주택의 핵심 정보에 대한 접근권을 중개인에게 허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 24일 대전 전세사기 피해자 임아무개(35·오른쪽)씨가 자신이 겪은 피해를 설명하고 있다. 박수지 기자

다가구주택 전세사기는 이처럼 제도 사각지대에 놓여 있지만 그 비중은 작지 않다. 이달 17일 기준 정부로부터 전세사기로 인정된 다가구주택 전세사기 피해자는 2천명이 넘는다. 구체적으로 전세사기 피해 중 다가구주택 유형은 2670건으로 전체의 17.3%를 차지한다. 다세대주택(33.5%) 유형의 절반을 웃도는 셈이다. 특히 대전의 경우 전세사기 피해 중 대부분(96%)이 다가구주택에서 발생했다.

물론 정부도 다가구주택의 이런 맹점을 풀기 위해 관계 부처 간 논의를 진행했으나 여러 법률들과 충돌 소지가 있다고 판단하고 더 나아가지 못했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다수의 임차인 정보가 알려지면 개인정보 보호 원칙과도 어긋나고, 민법 체계와도 맞지 않는 점이 있어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고만 말했다.


LH도 당한 사기, 개인은 도리가 없다

임아무개(35·대전)씨도 자신의 돈 2천만원에 중소기업 취업 청년 전세대출로 받은 8천만원을 더해 보증금 1억원에 다가구주택에 입주했다가 같은 처지에 놓였다. 임씨는 “집이 경매돼 넘어가면, 전세대출 보증을 서고 대위변제해준 주택금융공사에 원금을 20년간 매달 30만원가량 갚아 나가야 한다”며 “지금부터 갚더라도 50대 중반이 돼야 끝나는데 미래가 안 보인다”고 말했다. 소액 임차인에게 보증금의 30% 남짓을 변제해주는 최우선변제금도 대전 기준으로는 보증금 8500만원 이하만 해당돼, 이들은 해당 사항이 없다. 임씨는 “정부가 전세사기 설명회에서 나눠준 자료엔 최우선변제금 기준이 1억2500만원으로 돼 있었는데, 수도권 기준이라는 걸 알고 허탈했다”고 했다.

이들이 조금이라도 보증금을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은 국회에 회부된 이른바 ‘선구제 후회수’ 방안이 담긴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뿐이다. 물론 이 법안도 전세사기 예방 수단은 없으나 이미 발생한 피해를 신속하게 구제받을 수 있는 효과는 기대할 수 있다. 왜 다른 사기 피해자와 달리 전세사기 피해자들만을 위한 구제가 필요하냐고 묻는 정부와 사람들에게 임씨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고 했다.

“이 집의 피해자 중엔 한국토지주택공사(LH)도 있어요. 집주인 쪽은 엘에이치한테도 선순위 보증금을 속인 거죠. 엘에이치는 직접 법무사가 부동산에 와서 계약하고 전세임대를 준 사례인데 사기를 당한 거잖아요. 개인이 무슨 수로 기관보다 더 잘 알 수 있었겠어요?”

지난 24일 다가구주택 전세사기 피해 비중이 높은 대전의 한 다가구주택 골목. 한 골목에만 두채 넘는 집이 경매에 넘어간 경우도 있다. 박수지 기자

임씨의 임대인은 엘에이치가 입주 대상자들이 살 주택을 물색하면 우선 주택 소유자와 전세계약을 체결한 뒤, 입주자에게 재임대하는 ‘전세임대주택 지원제도’를 악용해 보증금을 가로챈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임씨는 말한다. “다가구라는 주택제도를 놔둔 건 정부잖아요. 전세사기는 하루 이틀 문제도 아니고, 계속 손봐야 한단 얘기가 있었고요. 그런데도 방치한 건 정부와 국회잖아요. 있는 제도를 이용한 것뿐인데 세입자만 피해 본 것에 대해선 국가에 손해배상까지 청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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