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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누군가 죽어야만 법과 제도의 공백을 한탄하는 일을 언제쯤 멈출 수 있을까. 끔찍한 데이트 폭력(교제폭력)이 또 하나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술 취한 남자친구에게 무차별로 폭행당하고 병원에 입원한 지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난 경남 거제의 스무 살 여대생 A씨 얘기다. 결별을 선언하고 남자친구의 연락을 차단해 놓았다는 것이 폭행의 이유였다. 남자친구 B씨는 긴급체포됐으나, 폭행을 인정한다는 등의 이유로 검찰의 긴급체포 불승인 결정이 나와 풀려났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폭행과 사망에 직접 연관이 없다는 1차 구두 소견을 내놓았다. 지병 없이 건강했던 젊은 여성의 죽음이 폭행과 연관 없다면 도대체 무엇이 원인일까. B씨는 현재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국과수의 정밀 검식 결과는 3개월 후에나 나올 예정이다.

연인 폭행 열흘 후에 여대생 사망
또 한 번의 비극 부른 데이트 폭력
재발 방지 법제화는 여전히 미적

고등학교 때부터 3년간 사귀어 온 두 사람은 B씨의 상습폭행으로 여러 차례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2022년 12월부터 1년 동안에는 경찰에 11번이나 신고했다. A씨의 대응과 방어는 ‘쌍방폭행’이 됐고, 매번 ‘처벌을 원하지 않아’ 사건은 현장에서 종결되거나 발생 신고 선에서 마무리됐다. 데이트 폭력은 따로 처벌법이 없고, 주로 ‘반의사불벌죄’ 규정이 있는 폭행죄로 다뤄진다.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 스토킹 범죄처럼 피해자·가해자 분리나 접근금지, 피해자 보호와 사후관리 등이 안 되는 이유다. 결국 11번의 위기 신호는 무시됐고, 마지막 12번째 신고는 죽음으로 이어졌다.

“너 죽어도 내 잘못 아니래.” B씨가 마지막 폭행 이후 A씨에게 보낸 메시지다. 유족에 따르면 B씨는 대학까지 하향 지원하며 A씨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진학하는 등 집착했다. 연인 관계를 정리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절교 폭력’에 스토킹 등이 동반되는 전형적인 교제폭력에 가깝다. 경남 지역 여성단체들은 “가해자를 즉시 구속하고 피해자 사망 원인을 명확히 규명하라”고 촉구했다.

2021년 서울 마포구 오피스텔에서 남자친구에게 폭행당해 사망한 고 황혜진씨 사건 이후 우리 사회에는 데이트 폭력의 심각성에 대한 우려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목소리가 컸다. 당시 폭행 장면이 담긴 CCTV가 공개되면서 공분이 일었고, 일명 ‘황혜진법’ 추진 움직임도 일었다. 국회에는 데이트 폭력을 기존 가정폭력처벌법에 포함하는 안과 별도 법을 마련하는 안 등이 제출됐으나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논의가 중단된 상태다. 그러는 사이 끔찍한 데이트 폭력 사건은 이어지고 있다. 경찰서에서 데이트 폭력 조사를 받고 나오는 길에 동거녀를 살해한 서울 금천구 교제살인 사건(2023)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상습적인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다가 최근 부산의 오피스텔에서 추락사한 20대 여성의 경우도 유족 측은 신고자인 남자친구에 의한 타살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데이트 폭력 신고 건수는 2019년 5만581건에서 2022년 7만312건으로 40% 넘게 늘었다. 검거율도 3년 새 30% 증가했다. 반면에 2022년 교제폭력 피의자 1만2821명 중 구속 수사를 받은 이는 310명으로 2.2%에 그쳤다. 범죄는 늘었는데, 처벌은 그를 따르지 못한다는 얘기다.

“교제폭력은 범죄적 폭력임이 분명하고 그 피해도 엄연하지만, 친밀관계 내 폭력이라는 이유로 정당한 범죄명을 부여받지 못한 채 형사정책의 대상에서 소외돼 있었다는 점에서 문제다. 교제폭력에 대한 정당한 범죄 명명의 부재는 가해자와 피해자에게 잘못된 신호를 준다.” 김한균 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의 말이다(‘교제폭력의 범죄 명명과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법제화’).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데이트 폭력은 그저 연인들 사이의 사랑싸움이 아니라 중범죄의 전조다. 반복적으로 일어나며, 살인 등 중대범죄로 이어질 확률도 높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 근간을 흔드는 젠더 갈등을 증폭시키는 여성폭력의 하나다. 더는 법제화를 미룰 여유가 없다. 아직도 희생이 부족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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