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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0일 총선에서 노동인권을 매우 주요한 과제로 표방하는 진보정당들의 성과는 초라하다 못해 “참혹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미미했다. 선거의 초라한 결과에 연연하지 말자. “우리의 꿈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느 방향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지난 3월10일 저녁(현지시각) 미국 엘에이에서 열린 제96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지난해 작가·배우·방송인 노조 파업에 동참·지지한 노동자들이 무대 양쪽에서 등장해, 할리우드 스타들이 기립박수를 치고 있다. 유튜브 갈무리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지난 3월 개최된 미국의 제96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놀라운 장면이 나왔다. 사회자 지미 키멀이 행사를 시작하는 인사말 도중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지난해 좋은 단체협약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우리와 함께 당당하게 연대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오스카상을 축하하기에 앞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와 함께 일해온 노동자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는 순서를 먼저 가져봅시다. 팀스터스(Teamsters), 트럭 운전사, 조명·음향·촬영 감독과 그 담당자들… 네, 맞습니다! 우리가 파업했을 때 피켓 라인을 넘지 않고 우리와 연대했던 바로 그 노동자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영어로 ‘비하인드 더 신’(behind the scenes)이라고 표현했다. 영화 화면에는 전혀 나오지 않지만 그 화면이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하도록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팀스터스’는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화물연대와 유사한 조직이다. ‘담당자들’은 영어로 ‘그립스’(grips)라고 표현했다. 조명·음향·촬영 분야의 맨 마지막 단계에서 그 도구들을 직접 손으로 잡고 일하는 노동자들이라는 뜻이다. ‘피켓 라인’이란 파업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이 손에 피켓을 들고 동료 노동자들에게 파업에 동참하자고 호소하는 대열을 말한다. 회사의 지시를 받고 굳이 그 피켓 라인을 넘어 일하러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피켓 라인을 넘지 않았다는 것은 그 파업에 동참했거나 최소한 지지했다는 뜻이다.

사회자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 바로 그 노동자들이 무대 양쪽에서 등장하기 시작해 무대를 가득 메운다. 할리우드 대스타들이 모두 일어나 한참 동안 기립박수를 치는 장면으로 인사말을 마무리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빨갱이’나 ‘좌익세력’ 취급을 당할 수도 있는 행동이다.

‘부자들의 천국’ 또는 ‘지본주의 원흉’ 심지어 ‘미제국주의’라고까지 불리는 미국 사회에도 흔히 ‘리버럴’이라고 불리는, 그러한 자유주의 정서가 있다. 그 정서를 대변하는 미국의 정당이 민주당이고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듯 꽤 자주 집권한다. 미국이 노동자 권리를 존중하는 나라라는 뜻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노동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철저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인 미국보다 훨씬 더 부정적·보수적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사회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왔다.

지난 4월10일 치러진 한국 총선에서 노동인권을 매우 주요한 과제로 표방하는 진보정당들의 성과는 초라하다 못해 “참혹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미미했다. 원내 의석을 확보한 진보정당도 독자적 정치세력화라기보다 비례위성정당과 야권 단일화라는 효과적 선거 전술의 성과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선거 열풍이 불 때마다 정치에 참여해달라는 연락이 오곤 한다. 이번 선거 때도 몇몇 진영의 캠프에서 참여해달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어서 ‘정치 근처에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살아왔다. 미안하다”고 일관되게 답했다. 대부분 “예상했던 답변이다. 그러실 줄 알았다”고 흔쾌히 이해해줬다.

노동운동을 하다가 정치에 입문하는 정치인들이 가끔 도움을 청할 때가 있다. 그래 봐야 ‘지지 선언’ 정도인데, 정파와 무관하게 활동해왔던 터라 일찍 연락하는 사람의 부탁에 응답하는 편이다. 나중에 친한 이가 연락을 해서 “노동운동을 해오신 분이라면 우리 쪽을 지지해야지, 그쪽을 지지하면 어떻게 하냐?”고 따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럼 좀 빨리 연락하지 그랬냐?”고 반농담처럼 답하고 넘어간다.

진보정당에서 활동하는 정치인을 지지하는 기준은 비교적 간단하다. 당대에 꼭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당대에는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후대의 자손들이 언젠가는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벽돌 한장을 쌓는 심정으로 활동하는 사람인지 하는 점이다. 내 판단이 항상 정확하지는 않아서 가끔 헛다리를 짚은 적도 있었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선거의 초라한 결과에 연연하지 말자.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꿈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도 비교적 초연해지자. “우리의 꿈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느 방향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그것은 마치 통일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가 통일을 지향하는 방향은 변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노동인권을 신장하고 노동운동 역량을 높이기 위한 노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할 수 없는 덕목이라는 생각으로 오늘도 새벽 기차를 탄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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