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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영 전 분당차병원 전공의 대표를 비롯한 사직 전공의들이 지난 15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에서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 집단고소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직 전공의 1360명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 등을 직권 남용 및 권리 행사 방해 혐의로 고소한다고 밝혔다. 뉴스1
전공의들은 의대 증원 추진 과정에서 “상처받았다”는 취지의 주장을 한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나온 정부 측의 가시 돋친 말들에 실망했다는 것이다. 1300여 명의 전공의는 지난 15일 상처의 가해자로 박민수 보건복지부 차관을 지목하고 직권남용 혐의로 공수처에 고소했다. “박 차관 경질 없인 복귀도 없다”는 입장도 밝혔다.

박봉과 격무에 시달리며 한국의 기형적 의료시스템을 떠받치는 전공의들이 상처를 받았다면, 정부가 반성할 부분이 있다. 사과이건 유감 형식이건 전공의들의 억울한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 정부의 의무다. 그러나, 특정 공직자를 경질하라는 전공의들의 요구엔 멈칫하게 된다는 시민들이 적지 않다. 사태 해결을 원하는 것인지, ‘분을 풀어달라’는 것인지 헷갈린다는 이유에서다.

전공의 이탈은 한국 의료시스템의 취약한 민낯을 보여줬다. 의사 인력의 40%(빅5 병원 기준)를 전공의에 의존하던 대형 병원은 수술과 진료를 절반 이하로 줄였다. 일부 병원은 경영난으로 무급휴직과 희망퇴직에 들어갔다. 그 대상은 의사가 아닌 일반직군이었다.

전공의 중 일부도 월급이 나오지 않아 기저귀나 분유값을 걱정하는 처지라고는 하지만,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일이다. 그러나, 무급휴직자나 희망퇴직자는 이런 상황을 스스로 결정한 적이 없는데도 ‘상처’를 입게 됐다.

이번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인 국민이 입은 상처는 어떨까. 수술이 밀린 환자들은 기약 없는 기다림에 마음을 졸인다. 당장 병원에 갈 일이 없는 이도 ‘아프면 큰일’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사고를 당하고도 제때 수술을 받지 못해 숨진 환자의 유족들은 천추의 한을 품게 됐다. 충남 보은에서 물에 빠진 33개월 아이는 지역 병원에서 이송할 대형병원을 찾지 못했고, 부산의 50대 남성은 대동맥박리 수술을 위해 울산까지 10곳 넘는 병원을 수소문해야 했다. 어차피 살릴 가능성은 희박했다는 의학적 판단이 유가족에게 위로가 될까.

전국의대 교수 비대위 방재승 전 위원장은 지난달 18일 “환자가 없으면 의사도 없다. 국민께 죄송하다”며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일부 학회도 잇따라 사과 성명을 냈다. 하지만, 전공의 단체는 아직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전공의들은 그들이 받은 것보다 더 큰 상처와 실망을 국민에게 안겼다. 윤석열 대통령과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대위원장이 만남이 있던 지난 4일에 나온 표현이 대표적이다. 대전협 비대위는 내부에 “지난 7주 내내 얘기했듯이 요구안 수용이 불가하다면 저희 쪽에선 ‘대화에는 응했지만, 여전히 접점은 찾을 수 없었다’ 정도로 대응한 뒤 원래 하던 대로 다시 누우면 끝”이라고 공지했다. 커뮤니티에는 편하게 드러눕는다는 뜻의 신조어 ‘탕핑’이 자주 회자되고 있다. 탕핑은 중국의 신조어이며, 드러누울 당(躺)에 평평할 평(平), 즉 편하게 드러눕는다는 뜻이다. 중국 젊은이들이 공산당의 경제 정책에 저항하는 의미로 적극적인 근로나 소비를 회피하고 최소한의 생계 활동만 하면서 집에 누워 있는 것을 의미한다.

전공의 내부의 정제되지 않은 글에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항변한다면 너무나 무책임한 생각이다. 실수일지라도, 박 차관의 ‘의새’ 발음 하나에 1만4000명 전공의가 분노했던 일을 기억한다면 더욱 그렇다. 편하게 드러눕겠다는 전공의들의 글을 읽은 환자와 그 가족의 기분을 떠올려 봐야 한다.

이제 대화의 시간이다. 전공의들은 탕핑 모드를 멈추고 병원으로 돌아와야 한다. 의사답게 병원을 지키며 정부와 대화하고 목소리를 내는 전공의에게 국민은 더 큰 응원과 신뢰를 보낼 것이다. 정부도 전공의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행정처분 등 법적 조치도 보다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전공의는 국민의 상처를, 정부는 전공의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 의료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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