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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 주필
투표에 나선 2966만2313명만큼의 각기 다른 심경과 판단이 있었을 터다. 그 시점 거기 존재했던 정치의 객관적 실체야 물론 하나다. 그러나 각자의 렌즈로 판단한 다수 민심은 정권 심판이었다. 선택의 여지 없는 소선거구제, 3번부터 시작한 왜곡된 위성정당 제도를 탓할 것도 없다. 선수들 스스로 합의한 룰이었으니. 각각 몇십 초의 날인들이 모여 심판으로 분출되기까지 2년여 기억의 축적이 있었다.

윤석열 정권의 탄생은 문재인 정부의 진영 편가르기에 대한 실망에서였다. ‘공정’ ‘정의’ ‘균형’ ‘통합’ ‘소통’ ‘협치’의 가치를 이뤄내 주길 고대했다. 그러나 기대는 서서히 의문에서 실망을 거쳐 좌절로 이어져 왔다. ‘아빠 찬스’ 의혹의 보건복지장관 강행, 특수부 검사 중심의 편향 인사 논란부터였다. 야당과의 대화 기피, 말 잘 듣는 여당 만들기는 포용과 민주적 리더십에 의문을 낳았다.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수사와 디올백 사건의 처리는 ‘공정’ ‘정의’의 기대를 사그러들게 했다. 으뜸의 오류는 국민 소통의 단절이다. 질문 외면과 일방 소통은 국민과 대통령 중 누가 나라의 주인인지 좌절을 안겨 주고 말았다. 다수 지지를 받는 의대 증원 역시 진정한 대화와 설득의 이슈 관리 부족에 “독선”의 역풍에 직면해 있다.

2년여 용산의 불통·독선적 태도에
누적돼온 실망·좌절·무력감이 분출
상대의 변화를 지켜보는 게 분노
용산·여야 모두 협치로 응답하길

세 차례쯤의 기회야 세상 모두에게 주어진다. 지난해 10월 강서구청장 선거 참패가 첫 번째였다. 그러나 “구청장 선거 하나 갖고 무슨 심판이냐”며 혁신의 시간을 허송했다. 이재명 민주당의 친명 공천 후유증 속 대통령 지지도가 39%(한국갤럽)를 찍었던 3월 초중반은 두 번째 찬스였다. 3월 6일에 이종섭 호주대사 논란, 14일엔 황상무 수석의 ‘횟칼 테러’ 발언이 돌출했다. 그 시점 의대 증원 문제를 유연하게 풀어낼 결단과 함께, 신속히 이 대사·황 수석 문제를 수습해 민심을 다독여야 했다. 총선 아흐레 전. 의대 증원 대국민 담화는 화난 민심에 기름을 붓고 말았다. 해결의 물꼬를 기대했다가 51분의 인내심 실험을 당한 허탈함에 선거는 거기까지였다. “역시 그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는 좌절·분노가 굳어졌다. 2년여 굳어져 온 용산의 자기 집착, 편향의 관성이었다.

대통령실의 한계가 노출된 건 오래다. 총선을 치른 시점의 실장·수석급 이상 중 자신이 선거를 치러 본 이란 한 명도 없었다. 늘 고시 출신 관료·검사들 이 주인이었다. 시험 권력으로 삶을 시작, 윗 분 기호에 맞을 페이퍼 워크로 살아온 이들이 다수다. 가장 수직적인 검찰 문화에서 지내 온 보스 밑에 역시 톱 다운 마인드 관료들의 조합이다. 현장을 느낄 수도, 그럴 필요도, 느껴 달라는 기대도 힘든 구조다. 내각·비서실 어느 곳에도 민심을 수렴하며 정치를 조율해 갈 지혜로운 스핀 닥터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 판단은 늘 우월하다”는 엘리트·특권 편향과 집착이 거리의 정서·상식과 동떨어지니 예측조차 안 되는 판단들이 이어져 왔다. 159명 희생된 이태원의 충격에도 “법조문상 귀책이 없지 않느냐”며 정무적 책임이 사라진 게 용산의 문화였다.

분노는 상대에의 기대와 요구가 꺾일 때 생긴다. 실망, 억울함, 좌절과 상실, 우울, 두려움이 얽힌다. 그 복잡한 감정들이 병목 현상에 이른 마지막 단계는 무력감이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주저앉을 가장 위험한 상태다. 그러면서 “너도 한번 나의 무력감을 느껴보라”는 심리가 발동한다. 모든 도덕과 정의의 황금률은 “그러므로 남이 너에게 대접해 주길 원하는 대로 너도 남에게 그렇게 대접하라”는 ‘호혜’와 ‘상호 존중’ 아닌가. 투표만이 무력감 속에 분노를 분출할 유일한 출구였다. “권력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란 걸 똑똑히 보여주자는 게 바로 이번 총선의 정신이다.

분노와 심판은 또 다른 기대다. 공동체의 생존에 필연적인 정서와 욕구다. “더 이상 그리 가면 모두 위태로운 파국”이라는 경고다. “인간에 두려움과 분노가 없었다면 벌써 멸종했을 것”이듯, 오히려 인간 관계나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들 수있을 전기다. 분노 안엔 그러니 상대에의 관심과 사랑도 존재한다. 어느 쪽에도 투표 안 한 유권자 3분의 1(1400만 명)이 그들 여야엔 훨씬 두려운 무관심이다. 반드시 분노와 심판에 뒤따라오는 특성이 있다. “당신이 내 뜻을 주목해 달라” “나는 너를 계속 지켜볼 거야”다. 상대의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려는 본능이다.

총선의 총 득표 차이는 5.4%(민주 50.5%, 국민의힘 45.1%)뿐이다. 투표율 67%이니 어느 쪽도 유권자 과반엔 턱없는 지지다. 대통령실과 여야 모두 “왜 내게 분노했을까”를 곱씹으며 영혼이 달라져야 할 이유다. 무엇보다 나라가 힘들지 않은가. 민생·경제, 미 대선, 어제 이란까지 가세한 전쟁 등의 국제 정세, 북한 등 어느 하나 편안치가 않다. 국정 기조 쇄신은 윤석열 정부엔 마지막으로 주어질 세 번째 기회다. 그만들 싸우고 협력해 국민 좀 편안하게 해달라는 게 심판의 기대다. 그대들의 권력이란 덧없이 짧다. 영원한 분노와 심판의 힘 지닌 전지전능은 단 하나, 국민뿐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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