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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 육아용품 매장. 연합뉴스

서울 소재 제2금융기관에 다니던 워킹맘 김모(30대)씨는 지난 달 입사 만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뒀다. 네 살 쌍둥이 자녀가 올해 유치원에 입학하면서 육아기 단축근무 제도를 신청했다가 회사와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 이미 육아휴직을 1년 사용한 김씨는 현행법을 근거로 매일 두 시간씩 근무시간을 단축해달라고 신청했다. 하지만 사측은 “대체 인력을 찾기 어렵다”며 거부했다. 회사와 입장차를 좁히지 못한 채 상사로부터 “동료 생각은 안 하냐”는 핀잔까지 들은 김씨는 결국 권고사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김씨는 “아기 낳았다고 승진이나 연봉 협상에서 뒤지고 싶지 않았다”며 “어떻게든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가 안 되려고 단축근무를 하려했던 것인데 오히려 경력이 완전히 단절돼버렸다”고 토로했다.

워킹맘이 경력단절 걱정없이 일과 양육을 병행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로 도입된 육아기 단축근무가 제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육아기 단축근무는 만 8세 이하 또는 초등학교 2학년 이하 자녀를 키우는 근로자가 최대 1년 동안 주당 근무시간을 15~35시간으로 단축할 수 있게 한 제도로, 지난 2012년 도입됐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사업주가 별다른 이유없이 신청을 거부하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 수 있다.

하지만 워킹맘들은 예외 조항 때문에 빛좋은 개살구처럼 느껴진다고 입을 모은다. 현행법상 사업주가 14일 안에 대체인력을 구하지 못하거나 업무성격상 근로시간을 쪼개기 어려운 경우, 근로시간 단축이 사업 운영에 중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 등엔 신청을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가 대체 인력 고용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거나 주관적으로 중대한 지장이 있다고 판단하면, 신청자로선 거부 당해도 별다른 방도가 없다. 제도가 생긴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사용률이 여전히 낮은 이유다.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2022년 일·가정 양립 실태조사’에 따르면, 상시근로자 5인 이상 사업체 5038곳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제도를 사용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곳은 5.4%에 그쳤다.

김영옥 기자

단축근무 제도를 사용하면 이듬해 유급 연차휴가가 줄어드는 점 역시 워킹맘으로선 신청을 망설이게 되는 요소 중 하나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1년동안 80% 이상 출근한 근로자에게 최소 15일의 유급 연차휴가를 보장한다. 1년 동안 매일 2시간 이상 육아기 근로단축을 사용한 근로자는 유급 연차휴가가 15일에서 12일로 줄어드는 셈이다. 쓰지 못한 연차 보상 수당도 줄어든다. 육아휴직 제도는 지난 2018년 이듬해 연차가 줄어드는 불이익이 없도록 법이 개정됐다.

사업체로선 육아기 단축근무 제도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토로한다. 최장 1년동안 하루에 1~5시간만 업무를 대신해줄 인력을 찾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남은 동료에게 업무 부담이 갈 가능성이 높고 대체 인력의 업무 숙련도 등도 문제가 된다는 게 사업체들의 입장이다. 고용부 조사에 따르면, 사업체가 육아기 단축근무 제도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 1위는 ‘동료·관리자 업무 가중(48%)’였고, 업무공백 처리 방법으로는 “남은 인력끼리 나눠서 해결한다”는 응답 비율이 71.9%에 달했다.

김영옥 기자

정부도 인력 공백을 메울 방안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현재 단축근무를 30일 이상 허용한 우선지원대상 사업주에게는 근로자 1인당 월 30만원씩 지원금을 주고 있다. 또 중소기업 사업주의 경우, 근로자가 단축 근무를 주 10시간 이상 사용하고 그 업무를 분담한 동료 근로자가 보상을 받으면, 정부가 회사에 최대 월 20만원까지 지원금을 주는 ‘동료인센티브’ 제도 역시 올해 하반기 시행할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업무 내용과 근로 시간을 기준으로 맞춤형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성미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장기적으로 육아휴직과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제도를 통합적으로 운영하는 시간 단위 육아휴직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미라 육아정책연구소 연구위원도 “육아를 위한 근로시간 단축이 아니라 전체 근로자의 유연근무 관점에서 근로시간 단축 제도가 논의돼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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