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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박수정의 오늘 여성노동자
치과기공사
수현씨가 치과기공학과 대학생 시절 공부하며 그린 치아 그림들. 수현 제공

돈 없어 일찌감치 직업계 학교로
근무여건 나을 거 같아 전공 선택
점심 30분에 쉼 없이 9시부터 8시
최저시급 미만에 부당한 초과노동

수현(가명)씨에게는 출력하지 않은 사진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 구립도서관 앞마당이 눈밭이 되었다. 어린 수현은 친구들과 눈사람을 만들며 웃었다. 다른 사진에서는 그대로 잣눈 위에 벌러덩! 두 팔을 위로 뻗어 대자로 누웠다. 아, 이 아이는 참 이런 아이구나 싶은, 보는 이가 행복한 사진이다.

패션디자이너 꿈 접고

초등학생 수현은 3학년부터 6학년까지 도서관 책 읽기 수업에 참여했는데, 30분 거리를 혼자 걸어 다녔다. 더우나 추우나, 비 오나 눈 오나 꾸준했다. 중간에 학교 방과후 수업과 요일이 겹쳐 한 학기 못 다닐 때도 그만두지 않았다. “다시 꼭 올게요”라는 자기 말을 지켰다. 동네 골목에서는 꼬맹이 동생들을 잘 데리고 노는 언니였다.

중학생 수현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고민했다. 그림 그리는 게 좋아 그때까지 한번도 꿈이 변하지 않고 패션디자이너였는데, 그림을 그리려면 돈이 꽤 든다는 걸 어린 마음이 느꼈다. 인문계 고등학교도 마찬가지. 거기서 대학에 가자면 그만큼 학원비가 필요하겠지. 수학 학원에 다녀보니, 다닐 때와 안 다닐 때 점수가 확 달랐다. “기출문제를 뽑아주는 정보력”을 매달 돈을 주고 살 수 있을까. 지금에 와서는 “의지만 있으면 혼자 할 수 있는데 너무 빨리 포기했던 느낌”도 든다는데, 당시 수현은 두살 아래 동생까지 생각해 직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사실 그냥 막연하게, 일단 취업이 잘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중3 때 특성화 고등학교에서 홍보하러 오는데, 보건의료 쪽이 괜찮아 보였어요. 간호사 된다, 취업률이 높다, 간호대뿐 아니라 일반 학과 진학률도 높다며 홍보가 좀 과장됐지만, 그전에 이 교정하면서 치위생사에 관심이 있었으니까요.”

고등학생 수현은 학교까지 전철로 1시간이 넘는 거리를 3년간, 출근길 직장인들 틈에 끼여 다녔다. 그중 2년은 방학마다 간호조무사 실습을 나갔는데, 한 치과병원에서 치위생사 말고 다른 선택지를 들었다.

“위생사 선생님이 그래요. ‘기공이 비전이다.’ 위생사는 약간 나이 들면 병원에서 굳이 안 쓴다고. 오히려 간호조무사를 더 쓴다고. ‘어, 그런가?’ 싶었죠. 내가 그림 그리는 거나 만드는 거 좋아하니까, 기공에 관심이 갔어요. 대학은 간호학과와 치과기공학과 둘 다 합격했는데 간호 쪽에는 ‘태움’ 이런 게 있다는 얘기에 치과기공으로 결정했어요.”

대학생 수현은 학교까지 2시간 전철을 탔다. 입시박람회며 여러 학교를 혼자 찾아다니며 선택한 학교였다. 코로나로 비대면 수업을 하던 학기에는, 석고 몇백개를 집에 쌓아두고 치아 형태 석고 조각 100여개를 완성했다.

“깎으면서 손가락도 아프고 ‘이 쓸모없는 짓을 내가 왜 해야 하지?’ 잠깐 회의감이 들었는데, 하나하나 하다 보면 또 재미가 있어요. 교과서 예시를 따라 치아 형태를 그리는 건 저한테 좀 잘 맞았고요. 열심히 공부해 치기공사로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면 보람될 거라 생각했죠.”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은 돈을 벌었다. 용돈을 집에서 일절 받지 않고 스스로 해결했다. 주휴수당이 없는 단시간 일자리밖에 없어 ‘오픈조’와 ‘마감조’로 하루 두 군데 카페를 뛰었다. 한 곳은 3년을 줄곧 일했다. 졸업해 기공사로 취직하면 이보다는 낫겠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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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써먹을 생각만 있던 곳

수현씨는 고등학교에서 간호조무사 자격증에 이어, 대학에서 치과기공사 면허증을 땄다. 취직을 앞두고 인터넷에서 기공사의 작업 환경을 알아보았다.

“박봉에 열정페이에 새벽에 퇴근한다면서, 이 일을 왜 하냐고, 차라리 다른 일을 하라는 말도 있어요. 물론 되게 즐겁게 일하는 분도 있죠. 기공사 면허를 따려면 실습을 하는데, 내가 만난 기공사분이 자기는 막내 일만, 잡일만 3년 했는데 그런 데는 가지 말래요. 아무것도 안 가르쳐주는 곳은, 아니다 싶으면 그냥 빨리 나오는 게 정답이라고.”

수현씨는 고등학교 3년에 대학교 4년을 보태, 보건의료계 진로를 차근히 준비해 드디어 기공소에 취직했다. 구직 사이트에서 찾아서 간 곳은 최저시급에 식대가 없었다. 선임은 친절했지만, 수현씨 역할은 “평생 쓸 보철물을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다음 기공소는 점심은 줬다. 몇십명이 일하는데 대표 가족이 밥상을 차렸다. 전날 남은 나물이 이튿날 잡채로 나오고, 반찬은 어쩌다 먹을 만했다. 점심시간은 채 30분이 안 됐다. 다 같이 먹고 다 같이 돌아와 일했다. 아침 9시에 출근해 저녁 8시에 퇴근하는데 쉬는 시간이 없었다.

“솔직히 휴게시간은 법정으로 줘야 하는 걸로 아는데 지켜지지 않죠. 일 양이 많으니까, 8시에라도 퇴근하려면 밥만 먹고 얼른 일하라는 거죠. 신입 월급이 적다는 건 알았는데, 세전 220만원은 최저시급도 안 돼요. 계약서에는 9시에서 6시까지로 썼는데 ‘여기가 6시 딱 칼퇴는 아니고 한 7시 고만고만 다 같이 끝나는 식이야. 막내니까 일 처리가 제일 늦지 않겠냐. 그래도 선배님들이 다 도와주실 거다’라더니 내 일이 끝나도 더 일을 줘 8시에 퇴근시켜요.”

집에 오면 밤 9시가 넘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씻고 다시 출근하려면 자야 한다. 친구는 9시에 끝나 집에 오면 12시란다. 그만두고 패스트푸드점 알바로 가거나, 다른 자격증을 준비하는 동기들도 있다.

“원래는 일하면서도 퇴근해 영어 공부라든지 자기계발에 시간을 쓰고 싶었는데, 8시에 끝나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연장수당을 주는 것도 아니고. 한번은 밥 먹으면서 물어봤어요. ‘항상 8시에 끝나요?’ 대부분 그렇대요. 그게 아주 당연하단 듯이 말해요. 아니 왜 이런 말도 있잖아요. ‘어떻게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하냐? 일은 일대로 하고 취미를 좋아하는 걸로 하면 되지’라는. 근데 취미 할 시간이 없어요. 일만 하고. 하하하하. 3디(D) 업종이 다 그런 것 같아요. 이 일이 사무는 아니고, 재료를 가지고 만들잖아요. 어쨌든 도제식이고, 사수한테 계속 컨펌받아야 하고. 열정페이도 있고, 진짜 시간을 준수할 수 없는 그런 일이니까 3디인 거죠. 교과서로는 내가 맞아도 고치라면 계속 고쳐요. 치과의사마다 스타일이 다르니까. 어떤 의사는 좀 동글한 느낌으로 만들고, 어떤 의사는 좀 각지게 만드는 걸 선호하고, 어디는 좀 길어야 하고 짧아야 하고, 이런 디테일을 현장에서 알아나가는 거죠.”

어려서부터 먼 길을 씩씩하게 다녔는데, 수현씨는 기공사로 가는 이 길을 잠시 멈추었다.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임금도, 부당한 초과노동도 어떻게든 버텨보겠는데, 이곳은 신입 기공사에게 곁도, 자리도 내주지 않았다. 써먹을 생각은 있지만, 발전시켜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10대의 자신처럼 진로를 고민할 누군가에게 수현씨는 자신에게 해주지 못한 말을 전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어려서부터 취업에 연연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 공부를 먼저 생각하고 해나가면 언제든 솟아날 구멍은 있는 것 같아요. 그 시절 나는 나를 너무 빠르게 단정 지었어요. ‘인문계 가봤자 공부를 잘하지 못할 거야. 그럴 바엔 빨리 취업해서 돈을 벌자.’ 그런 생각만 했는데,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아요. 공부를 못하진 않았는데 너무너무 높아 보였달까? 상위권 대학을 가려면 어느 정도는 공부해야 갈 텐데, 그러자면 학원에 들어갈 돈도 무시 못 하니까요.”

수현씨는 워킹홀리데이를 신청하려 한다. 어학시험도 곧 치른다. 마음 가는 일도 탐색할 거다. 시도하고 도전할 거다. 누군가에게 딱 맞고 튼튼하며 편안한 보철물을 만들어 줄 기공사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겠다. 일단 지금은 눈밭에 누운 어린 수현처럼 자유롭고.

르포 작가

‘여자, 노동을 말하다’(2013) 저자. 여성노동자가 머물고 움직이는 장소, 일하는 시간에서 이야기를 찾아 들려드립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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