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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원 동덕여대 교수가 그린 반계 유형원의 영정. 한겨레 자료사진


1898년 6월23일 진사 김우선(金宇善)은 고종에게 상소문을 올린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전지(田地)를 측량하는 사업 곧 양전(量田)을 하려는 참이었다. 관보(官報)에서 그 소식을 읽은 김우선은 이왕 양전을 하는 김에 토지제도까지 고치자고 제안했다.

흥미로운 것은 김우선이 그 제도의 원칙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반계수록’(磻溪隧錄)에서 가져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반계수록’이 균전법(均田法), 정부(正賦, 세금), 양사(養士), 임관(任官), 제군(制軍)의 규례, 잡의(雜儀) 14조로 구성되어 있다고 간단히 요약한 뒤 이 책은 더할 수 없이 정확한 통치의 방법을 싣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우선이 바꾸자고 제안한 토지제도 역시 ‘반계수록’의 균전법, 곧 균전제(均田制)였다. 유형원은 소수의 지주가 토지를 광점(廣占)하고 경작하는 농민이 토지를 상실하는 것이야말로 17세기 조선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모든 토지를 국가가 공유하고, 경작하는 농민에게 일정한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균전제를 실행해야만 하였다. 김우선 역시 유형원을 따라 토지의 균분(均分)을 시행하자고 역설했다.

김우선은 유형원의 균전제를 실행하면, 위로는 왕의 자식들, 고급관료, 관료가 되기를 준비하는 선비로부터 아래로는 평범한 백성, 서리(胥吏), 군사, 노복(奴僕)까지 각각 등급에 따라 토지와 녹봉을 받을 수 있고, 넉넉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이뿐인가? 벼슬을 그만두거나 죽는다 해도 처자식은 안심하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토지를 두고 벌이는 소송도 사라질 것이다. 공을 세우거나 절의(節義)가 있는 사람은 세금을 면제해 줄 수 있을 것이고, 공부하는 선비들 역시 장학금으로 토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반계수록’의 균전제를 시행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고종은 어떻게 답했던가? “상소문을 읽어보고 내용을 다 알았다. 그런데 너는 지금 시대 상황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런 말을 하는구나!” 좀 낡기는 했지만 김우선이 제안한 토지의 균분제는 진지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종은 간단히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로 치부하고 말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김우선은 다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반계수록’의 개혁책은 2백년이 넘도록 한 번도 실행된 적은 없었다. 왜인가? 김우선 자신이 “균전법은 모든 사람이 원하지만, 토지를 많이 소유한 사람만은 원하지 않는다”고 했듯, 지주계급은 ‘균전’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왕과 그의 피붙이 역시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균전제는 국가권력을 독점한 조선 최고의 지주가 싫다고 거부하면 그만이었다. 왕정의 권력 독점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 개혁은 불가능한 말이라는 것이다. 김우선은 물론 개혁을 외친 조선의 모든 지식인들은 왕정이 갖는 문제에 대해 숙고하지 않았다. 하기야 땅 한 토막 없는 자들까지 왕정의 이데올로기에 깊이 세뇌되어 왕이 죽으면 눈물을 질질 짜곤 했으니, 이것이야말로 불평등의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최종 근거였을 터이다.

총선이 끝났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김우선의 상소가 떠올랐다. 어떻게 해야 개혁이 가능할 것인가?

강명관/인문학 연구자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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