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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도매시장법인이 수탁권 독점
경북 영주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장신덕(65)씨가 지난해 우박을 맞아 상한 사과를 들어 보이고 있다. 김규현 기자

“우리 사과가 작년에 을매나 마이 다칫는지 함 보소. 사과값이 금값이면 머 하능교.”

지난 4일 오전 경북 영주시 문수면의 한 사과밭. 장신덕(65)씨가 저온창고 문을 열자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싱싱한 사과가 쌓여 있어야 할 창고에 흠집 나고 물러진 사과 500여개가 노란 플라스틱 상자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지난가을 우박을 맞아 내다 팔지 못한 사과들이라고 했다.

생산 30% 감소에 가격은 90% 상승

올해로 32년째 사과 농사를 짓는 장씨는 지난해가 “농사짓기 가장 힘든 한 해”였다고 했다. “5월에 영하 7도까지 내려갔다 카마 믿겠습니꺼. 사과꽃 나자마자 다 얼어 죽어뿌고, 여름 내내 비 억수로 퍼붓고, 10월에는 달걀만 한 우박이 떨어져가 난리 났다 아입니꺼.”

지난해보다 3배 가까이 도매가격이 올랐지만, 내다 팔 사과가 없으니 소득은 줄었다. 장씨는 “한 해 사과 매출이 1억4천만원 정도인데, 올해는 반토막이 났다. 사과가 금값이라도 이득 보는 건 우리 같은 농민이 아니라 따로 있다”며 얼굴을 붉혔다.

지난 2일 통계청이 발표한 ‘3월 소비자물가 동향’에서 지난달 사과값은 1년 전 같은 달에 견줘 88.2% 올랐다. 통계 작성이 시작된 1980년 1월 이후 최대치다. 지난해 사과 생산량은 39만4428톤으로 전년(56만6041톤)보다 30.3% 줄었다. 생산량 감소폭에 견줘 사과값 상승폭이 3배 가까이 높은 셈이다.

지난 4일 서울 가락시장의 과일 경매장에서 사과 경매가 진행되고 있다. 허윤희 기자

같은 날 아침 8시 서울 송파구 가락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의 과일 경매장에서 사과 경매가 한창이었다. “삼번 육만, 육만이천, 따이따이따이….” 이동식 경매대에 올라선 경매사의 속사포 랩 같은 ‘호창’이 울려 퍼졌다. 한쪽에 전국 산지에서 온 10㎏짜리 사과 상자 500여개가 쌓여 있었다. 중도매인 10여명이 빠른 손놀림으로 응찰기에 사과값을 눌렀다. 전자현황판에 뜬 최고가는 7만원(10㎏)이었다.

가락시장에서 만난 경매사 김아무개씨는 “12년 동안 경매를 하면서 올해처럼 이렇게 (사과 물량이) 없던 적도, 비싼 적도 처음”이라며 “작년 이맘때 사과 10㎏이 4만~5만원 정도였는데, 최근엔 최고가가 11만원까지 나왔다”고 말했다. 지난해에 견줘 사과 도매가격이 2~3배 높아졌다는 얘기다.

가락시장은 우리 농산물 가격의 ‘기준점’이 되는 곳이다. 전체 농산물의 50% 이상이 전국 33개 공영도매시장에서 거래되고, 이 가운데 40%가량이 가락시장으로 온다. 대형마트가 산지 농민과 직접 거래하는 비율이 갈수록 늘지만, 마트 가격의 기준도 가락시장 시세다.

대형 도매법인 입김에 흔들리는 ‘경매제’

공영도매시장에서 사과 등 농산물 가격이 정해지는 방식은 경매다. 생산자가 맡긴 수확물을 도매시장법인이 경매에 부쳐 중도매인에게 넘기고, 낙찰가의 4~7%를 수수료로 받는다. 전국 공영도매시장의 경매는 지정된 도매시장법인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가락시장에는 농협 포함 6개 도매시장법인이 있다. 보통 중도매인들은 하나의 도매시장법인에 속해 경매에 참여하고, 낙찰받은 물건을 마트나 소매점에 판다. 최대한 비싸게 팔아야 하는 도매시장법인과 싸게 사야 하는 중도매인의 긴장 속에서 ‘공정한 시장가격’이 형성될 거란 기대로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하지만 대형 도매법인들이 독점 운영하는 ‘경매제’가 유통 비용을 끌어올린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2021년에 발간한 ‘농수산물도매시장 주요 쟁점과 정책적 함의’ 보고서에서 “경매사(도매시장법인)가 특정 중도매인에게 낮은 가격에 입찰시켜주거나, 좋은 품질의 상품을 독점적으로 낙찰받게 해주고, 경락가격을 조작하는 등 불공정 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한다”며 “2019년 9월 거래된 주요 13개 품목의 전체 거래 중 단독 응찰이 1.79%, 경매 개시 뒤 3초 이내 낙찰 건수가 33.28%로 나타나 경매 공정성에 대한 의혹이 고조됐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더해 소수의 도매시장법인이 수탁권을 반영구적으로 독점하는 구조가 가격 상승을 한층 가파르게 한다. 수수료 장사를 하는 도매시장법인 입장에선 사과값이 비쌀수록 이득이기 때문에 시장 공급량을 줄이면 줄였지 굳이 늘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협회까지 꾸려 세력을 공고히 한 도매시장법인들은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땅 짚고 헤엄치는’ 현금 장사를 할 수 있고, 농산물 가격이 오르면 오를수록 돈을 더 벌어 자금력을 키우는 것이다.

최병옥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사과는 가을에 수확해 저장했다가 다음해 1년 동안 먹는 과일인데, 사과를 가지고 있는 유통업자들이 저장 창고 문을 닫고 공급을 조절하면 값이 점점 더 오르게 된다”며 “당장 내놓지 않고 참았다가 열흘 뒤 경매에 부치면 몇배로 가격이 뛸 텐데 시장에 풀겠느냐”고 반문했다.

정부의 ‘금사과 대책’ 효과 있을까?

정부는 사과값 안정화 대책을 부랴부랴 내놨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지난 2일 물가관계 장관회의에서 내놓은 ‘과수산업 경쟁력 제고 대책’(2024~2030)이다. 강원도 사과 산지의 재배 면적을 2배 이상 넓히고,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재해(냉해·태풍·폭염) 예방시설 보급률을 30%까지 올리겠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여기엔 계약재배 물량을 6만톤으로 확대하고, 온라인 도매시장 활성화로 유통 비용을 10% 절감하겠다는 계획도 포함됐다.

하지만 이런 대책이 사과값 안정에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가격 상승의 원인인 ‘도매시장 경매제도’를 손보지 않는 한 생산량이 조금만 줄어도 가격이 폭등하는 현상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백혜숙 지속가능국민밥상포럼 대표는 “기후위기 시대에는 농산물 유통 구조가 더 유연해져야 한다. 도매시장에서 경매로만 농산물 가격을 정하는 현행 방식이 아니라 도매상이 생산자·소비자와 직거래할 수 있는 ‘시장도매인 제도’를 도입하면 도매시장법인의 독점을 완화해 농산물 가격이 지금보다는 안정될 여지가 생길 것”이라고 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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