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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오전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의과대학 증원을 비롯한 의료 개혁과 관련한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를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황보연 | 논설위원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고 장담하는 의사들과 ‘특권적 의사 집단과 싸우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대치 국면이 50일 넘게 이어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일 대국민 담화에서 “역대 정부들이 (의사들과) 9번 싸워 9번 모두 졌다”고 했다. “지난 27년간, (의사 증원은) 그 어떤 정권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고 “이제는 그러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언급한 ‘9번 싸움’의 시작은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의사가 없는 지역에서 경력과 기술이 인정되면 의료행위를 하도록 했던 ‘한지(限地) 의사’에게 정규 의사면허를 부여하는 제도 도입이 추진됐다가 의사들의 반발로 무산됐다. 이승만 정부 시절의 일까지 거론하며 역대 정부와 차별화에 나선 것이다.

애초 의-정 갈등의 장기화는 예견된 것이었다. 의사들의 협상력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 강력하다. 대체 불가능한 독점적 권한(의사면허)으로 응급·중증 환자들의 생사를 좌우한다. 1999~2000년 의약분업에 반대했던 의사들은 5차례에 걸쳐 단체행동을 벌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약품 오남용을 막아 국민 건강을 지키자는 것이) 이렇듯 큰 파문이 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의약분업을 실시하는 것은 하나의 문화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적었다. 그는 재임 기간 중 가장 큰 사회 갈등으로 의약분업 사태를 꼽았다.

정부도 이를 몰랐을 리 없다. 불과 4년 전, 문재인 정부는 한 해 400명씩 의대 정원을 늘리자고 했다가 의사들의 집단 휴진에 버티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이번엔 의대 정원 3058명의 65%인 2천명을 늘리자는 더 과감한 증원안이었다. 집단행동이 불러올 파장을 뻔히 알면서도 대비책은 세워두지 않았다. 협상 전략은 부재했고, 검찰 정부답게 법과 원칙이 강조됐다.

지루한 싸움이 계속될 줄은 국민만 몰랐던 것 같다. 50일 동안 정부는 전공의에 대한 행정처분만 유예했을 뿐 국면 전환을 위한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정상회담보다 더 많은 시간(140분)을 할애했다”는 지난 4일 윤 대통령과 전공의 대표의 만남도 성의를 보이는 전시효과에 그쳤다. 의사들은 물론이고 정부에서도 긴박감은 보이지 않았다. 동네 병원이 정상 운영되고 있으니 국민 다수는 불편을 못 느낀다고 여긴 것일까. 수술이나 치료가 연기될까, 응급처치를 받지 못할까 노심초사하는 응급·중증 환자들의 속만 타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정부의 의료개혁은 ‘2천명’이라는 논쟁적 숫자만 남겼다. 국민 다수가 의대 증원을 지지했던 것은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과 오픈런’, ‘수도권 원정 진료’로 드러난 의료공백 문제가 나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확산된 영향이었다. 대부분 의료기관이 이윤 경쟁에서 자유롭지 않다 보니 의사 공급의 불균형이 심각한 지경이다. 보상이 부족한 필수의료에는 전문의가 부족하고, 비급여 진료로 많은 돈을 버는 개원가에는 의사가 몰린다.

‘2천명이 맞냐, 틀리냐’로 논점이 공회전하는 동안에 의사가 부족한 곳에 의사를 어떻게 늘릴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실종됐다. 정부 정책에 박수를 치던 이들도 지금은 본말이 전도된 것 아닌지 의심한다. 정부가 연일 브리핑을 열어 백화점식 정책을 나열하고 있지만, 정작 재정이 많이 투입돼야 하거나 논란이 큰 민감한 사안에는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보이지 않는다.

총선 이후, 의-정 갈등은 본격적인 협상 국면에 들어설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정원 감축’까지 주장하는 강경파가 득세하는 의료계가 합리적 안을 내놓을 리 만무하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표의 유불리로 입을 닫고 있던 이들의 백가쟁명식 대안이 쏟아져 나올 수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의약분업을 관철하는 과정에서 “실패한, 그리고 피곤한 개혁이라는 평가를 많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의사들을 설득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에서 나오는 ‘연기 또는 유보’ 의견에 대응하기도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앞서 윤 대통령의 담화가 ‘기존 입장 고수’로 알려졌을 때 여당 의원들은 탄식을 쏟아냈다. “날아오는 혜성을 보면서 멸종을 예감하는 공룡들의 심정”(국민의힘 의원·경향신문 인터뷰)이라는 식의 압박은 앞으로도 강해질 것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의사를 늘려 필수·지역 의료 붕괴를 막는다는 정책 목표를 되새기고, 이를 위한 최소한의 원칙과 기준, 실행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의료 카르텔 척결’이라는 정치적 구호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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