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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신좌섭 시인을 추모하며

‘월북 외조부’ 연좌제 탓 의대 진학
서울의대 본과 2년 때 학업 접고
노동운동 투신해 13년간 활동

지난달 30일 세상 떠…향년 65
사구재 무렵 부여서 신좌섭문화제
2017년 첫 시집을 내고 한겨레와 인터뷰 때 찍은 고인의 사진이다. 김경호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벽에 기대앉아 눈 감고 있는 아버지를 한 아이가 골똘히 바라본다. 그 아버지가 눈을 감고 구상한 작품은 서사시 ‘금강’(1967)이었다. 1969년 4월7일, 국민학교 4학년생 소년은 아버지를 영원한 처소로 배웅했다. 소년은 9년이 지난 1978년에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다.

“월북한 외할아버지 때문에 연좌제가 있으니, 다른 전공은 생각할 수 없었어요.” 외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여러 번 옥고를 치른 농촌경제학자, 해방 후 동국대 교수를 하다가 월북하여 농림성 장관을 지낸 인정식이다. 1982년, 의대생 신좌섭(지난 3월30일 별세·향년 65)은 네 살 선배 권순긍(세명대 명예교수)이 가르치던 야학에 참여한다. “수유감리교회(박덕신 목사)에서 노동야학을 시작했는데, 거기에 좌섭이가 왔어요. 수유리 봉제공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좌섭이는 영어·수학, 나는 국어를 가르쳤지. 좌섭이는 영문판 체 게바라를 늘 탐독했지.”

야학에서 아버지 시 ‘종로5가’에 나오는 막노동자를 만났을까. 1983년 봄날 권 선배와 명륜시장 유정집에서 콩비지에 술 몇 잔을 나눈다. “형, 아무래도 현장으로 가야겠어요. 한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것보다, 노동자를 병들게 하는 현실을 바꾸고 싶어서요.” 의대를 졸업하고 하라고 권했지만 신좌섭은 이미 결심한 상황이다. 깡마른 몸 어디서 저런 용기가 날까. 이후 그는 구로노동상담소에 참여한다.

서울의대 본과 2학년 때 의사의 길을 접은 그는 “기름기 빠진 꺼칠한 얼굴과 자동 선반에 찢기고 절삭유에 찌든”(신좌섭, ‘아버님과 나’) 성남 노동현장으로 1986년에 투신한다. 13년간 노동운동, 빈민운동을 한 그는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을 위하여’(1988)라는 책도 낸다.

아버지 신동엽 시인을 기리는 충남 부여 신동엽문학관 앞에 선 신좌섭 교수. 박은미 제공

그 무렵 나는 부여 신동엽 시인 생가에 가서 시인의 아버지 신연순 옹을 만나고, 이후 신동엽을 연구한 석사 논문을 들고 인병선 여사를 뵈었다. 밤새 아들 자랑을 하던 신연순 옹의 환한 표정과 달리, 인병선 여사의 표정은 처절하도록 암담했다. 월북학자 아버지로 인해 연좌제를 겪는 딸, 40살 나이에 간암으로 사망한 남편의 부인, 노동현장으로 간 의대생 아들의 어머니, 한 여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침울했고 기구한 운명이었다.

수 년이 지나 2004년 겨울날 인병선 여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신동엽 시인 자료를 정리하는데 한번 와보시겠어요?”

여사는 딴사람처럼 행복해 보였다. 1975년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판매 금지가 된 신동엽 시인의 시가 1989년에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다. 월북한 아버지의 ‘인정식 전집’(1992)이 출판되고, 여사도 1993년에 짚풀생활사박물관을 명륜동에 열었다. 무엇보다도 노동현장에 있던 신좌섭이 2005년에 서울의대 교수로 임용된 큰 기쁨이 있었다.

복은 넝쿨로 온다고, 얽힌 문제들이 줄줄이 풀리던 그 무렵 짚풀생활사박물관에서 나는 며칠 지내며 ‘신동엽 평전’을 썼고, 거기서 신좌섭 교수를 처음 만났다. 미덥고 훈훈한 얼굴에서 거친 노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 얼굴하고 목소리하고 걷는 모습까지 꼭 닮았어요.” 빙그레 웃는 인병선 여사 곁에 서 있는 선생의 모습은 신동엽의 에피퍼니(epiphany, 현시)였다. 시집 ‘네 이름을 지운다’(2017)를 낸 그는 의학서적 ‘이타적 유전자’ ‘의학의 역사’ 등 여러 책을 번역·집필했다. 의대에서 어떤 일을 하시느냐고 물으면, 토론식 수업을 한다고 그는 답했다. 대화하여 혜안을 찾아내는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 교육을 행한 그는 한국퍼실리테이터협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아버지를 닮은 데서 멈추지 않고, 그는 아버지의 고민을 현실에 적용한다. 세계보건기구 교육개발협력센터장을 맡아 라오스, 미얀마 등 개발도상국의 의학교육을 위해 힘썼다. 그의 페이스북을 보면 아시아 여러 나라 의사들이 감사하며 애도의 글을 올리고 있다.

2019년 10월에 식도암 수술을 받았으나 조용하면서도 강단 있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사슴처럼 순한 눈에서 삽시에 서늘한 눈빛을 발하다가, 느닷없이 피식 웃는 그에게 우리는 일순, 무장해제 됐다.

얼마 전 올해부터 신동엽 학술상을 운영하자고 전화 주신 그는 학회 때마다 식사비를 냈다. 상대의 말을 들으려고 고개 숙여 귀 기울이는 그는 친형처럼 다정했다. 의사에서 혁명가로 변한 체 게바라나 루쉰, 가난한 빈민 기사를 읽고 울었던 카프카가 떠오른다.

한 줌의 재가 되었다는 허탈한 부고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어릴 때 뵈었던 김수영 시인, 열 살 때 배웅했던 아버지 신동엽, 사숙했던 체 게바라가 “좌섭아, 수고 많았어”라며 저 나라에서 반갑게 부둥켜안을 것이다.

긴 세월 함께해온 강형철・박상률・김형수・정우영 시인과 이 서생이 사구재 무렵에 그가 사랑한 부여에서 신좌섭 문화제를 열기로 했다. 별을 빛나게 하는 겸허한 어둠으로 살아온 그야말로, 눈 아린 샛별이다. 이 글은 슬픈 추도사가 아니다. 한 시인의 투쟁을 이어갈 긴 글의 서문일 뿐이다.

김응교/시인·신동엽학회장·숙명여대 교수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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