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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우진영의 한국 근현대 미술 잇기
그림의 온도
주경의 ‘온실의 꽃’(1920). 주성태 제공

“아, 정원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얼마나 현명한 신의 손길인가.” ‘빨간 머리 앤’의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일기 중 일부다. 읽기만 해도 들뜬다. 100여년 전 주경이 그려낸 근대의 온실과 동시대의 노은주가 만들어낸 정원 풍경이 궁금하다.

뜨거움에 다가서는 근대의 온실

‘온실의 꽃’을 도판으로 처음 보았다. 주전자가 보인다. 응접실 식탁에 놓여 있을 듯하다. 단정하게. 생동하는 색채 때문일까. 꽃향기가 난다. “모던하다”고 읊조려본다. 주경이 그린 정물들은 고급스럽다. 그의 집에는 이처럼 풍성하고 화사한 꽃들로 채워진 온실이 있었을까. “주경은 소학생으로는 처음 서울에서 먼저 구두를 신었고 학교는 자가용 인력차로 통학했다.” 친구였던 정길원 박사의 회고다. 주경은 그 시절 가장 현대적인 것들을 경험했다.

그의 그림에는 이국적 정취가 한껏 배었다. 근대에는 많은 ‘처음’이 존재한다. ‘취미’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지금 장미꽃 동산은 지난 일일부터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붉은 장미의 그윽한 향기를 상찬하게 한다.” 1920년 6월3일치 ‘매일신보’에 실린 ‘낙원=장미원, 하루 날에 삼백명의 입장한 자가 있었다’라는 기사 중 일부다. 서양의 정원 풍경이 경성에 성큼 들어서는 중이었다. 근대의 정물화는 이제 시작되었으리라. 모던보이 주경은 새로움을 놓치지 않았고 이 그림을 그렸다. 그의 나이 15살이었다.

주경은 그 뒤 고희동에게 정식으로 처음 그림을 배웠다. 1928년 유학길에 올랐다. 가와바타미술학교와 데이코쿠미술학교에서 서양화와 조각·판화를 공부했다. 유학생들의 모임 ‘백우회’를 창립해 활동하며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와 조각 작품을 출품해 입선했다. 유럽에서 새로운 미술사조들이 일본으로 떠밀리듯 밀려오는 중이었다. 주경은 그 파도를 온몸으로 흡수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정물화에는 근대의 ‘아카데미즘’ 너머가 보인다. ‘바구니가 있는 정물’(1936)은 사실적이다. 컵과 사과는 정확한 형태다. ‘푸른 배경의 꽃’(1939)은 격정적이다. 배경의 색채는 어둡고 음울하다. 누군가는 사실주의자라고 말한다. 빈틈없이 정교한 데생력에. 어떤 이는 표현주의 화가라 맞선다. 강렬하게 뿜어내는 색채와 재현에 매이지 않는 구성에. 누가 정물화를 정지한 그림이라고 말하는가. 주경의 정물은 이토록 자유롭다.

그의 정물화를 하나의 사조로 규정짓기 어렵다. 다만 ‘뜨거움’이라 말하고 싶다. 2021년 가을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온실의 꽃’을 마주했다. 노란 바탕 위 새어나온 풀들과 꽃집을 그대로 옮겨온 듯 날아다니는 색들. 엉킨 수풀 속 나비가 숨어 있으려나. 온실의 온기를 넘어섰다.

“생활의 내부로부터 얻은 깊은 감흥과 정서를 단순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사실을 즐겨 말라’라는 제목의 글에서) 주경은 대상에서 진실을 찾아내고자 했다. 마치 ‘구상이니, 추상이니’, ‘고전주의다, 실험적이다’라는 후대의 논란에 아랑곳하지 않듯이.

유학 중 가세가 기울었다. 붓끝까지 전해지던 야망을 애써 식혀냈다. 귀국 후 대구에 정착하며 미술교육에 힘썼고 행정가로도 활동했다. 기량이 절정을 향하던 때였다.

“생전의 어떤 어려움에도 내색하지 않으셨다.” 아들 주성태의 말이다. 삶의 태도는 일관되었다. 캔버스에 펼쳐낸 세계는 반대였다. 모든 미술 장르들이 아우러졌다. 주경의 정물화에는 우리가 맞이한 근대가 있다. 뜨거움을 간직한.



노은주의 ‘스틸 라이트 2’(2023). 노은주 제공

얼음나라에 꽃이 피고 지고

선과 뭉치들이 얽혀 있는 그림이 보인다. 밖을 향하고 있다. 옷깃을 잡고 갤러리 문을 열었다. 지난겨울 서울 연남동 갤러리 ‘챕터 투’에서 노은주의 작품을 만났다. 여기는 얼음 나라인가. 백색으로 덮인 공간에 서니 온도가 쉬이 높아지지 않는 기분이다. 전시실은 분명 따뜻한데도.

나란히 걸린 세 개의 작품이 궁금하다. ‘버려진 것에 관심이 많은가.’ 자세히 보니 꽃이다. 위태로워 보인다. 철사 같은 선들은 식물의 줄기인가. 그렇다면 정물화인가? 작품 중 ‘스틸 라이트 2’에 유독 눈길이 멈춘다. 가느다란 실타래가 연상된다. 구부러지지 않는 철근 같기도 하다. ‘스틸 라이트 2’의 꽃은 사라질 듯 흘러내린다. 신기하다. 아슬아슬하게 엉켜 간신히 매달려 있음에도 동적이다. 말라버린 가지에 감겨 있는 물질들이 움직인다. 볼수록 차갑다. 냉정한 정물화다.

때로 만들어진 정원의 풍경이 버거울 때가 있다. 축제라는 타이틀을 달고 넘쳐나는 화사함이 어지럽다. 보이기 위해 억지로 꾸며져서일까. 가까운 친구 부모님의 장례식장을 다녀온 날이었다. 그저 슬펐다. 상실의 깊이에 내가 가닿을 수 없음에. 돌아오며 자꾸 발밑을 보았다. 길가의 틈새 사이로 꽃송이가 고개를 내민다. 색을 잃은 꽃송이였다. 삶은 그럼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주듯이. 그 장면을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스틸 라이트 2’ 속 꽃들은 피어나고 있다. 삶의 귀함은 화려하게 만개하는 날들에 있지 않다. 정지한 시간 속에서 시계추를 돌리려는 작은 손짓들에 존재한다. 가느다란 선에 의지해 어려이 달라붙은 마른 꽃잎들이 더 이상 애처롭지 않다.

“개화와 낙화가 공존하는 정원을 상상했다.” 최근 작업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물들을 데려오고 싶었단다. 노은주는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아트선재센터, 뮤지엄 산 등에서 열린 그룹전에 참여했다.

노은주의 그림 곁에 머무르면 알게 된다. 연약해 보이지만 단단함이 있음을. “그렸던 대상이나 재료들을 바로 버리지 않고 작업실에 두고 관찰한다.” 노은주의 고백이다. 시간을 두고 스스로에게 정교한 질문을 건넨다. 그림 속 실낱같은 가지가 더 이상 위태롭지 않다. 꽃들은 이야기한다. 만개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의 차가운 정물화에 불이 켜졌다. 스틸 라이트.

꽃이 피는 날들이다. 모두에게 찬란하지는 않으리라. 아직 마음이 서늘하다면 ‘주경’의 온실로, 타오르는 상념으로 힘든 이들은 노은주의 ‘정원’ 으로 초대하고 싶다. 열정과 냉정 그 사이로.

미술 칼럼니스트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소심하고 예민한 기질만 있고 재능이 없단 걸 깨달았다. 모네와 피카소보다 김환기와 구본웅이 좋았기에 주저 없이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전공했다. 시대의 사연을 품고 있는 근대미술에 애정이 깊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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