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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이병남의 오늘도 성장하셨습니다
경계인의 삶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오래전부터 선배님을 경계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최근 한 후배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유는 이랬습니다. “선배님은 대학 시절에 데모하고 졸업 뒤엔 구치소도 다녀오셨죠. 또 미국 유학 뒤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셨고요. 귀국해서는 대기업 고위 임원으로 일하면서도 시민단체들을 조용히 도우셨죠. 댁에서는 종교인 모임을 10년 넘게 하셨고요.” 후배는 제가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경계를 넘나들면서 살았다고 본 모양입니다.

지난 제 삶을 돌아보니, 후배의 말처럼 경계인으로서의 삶이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 모두 한국전쟁 때 피난을 왔고, 제가 서울에서 대구로 전학 간 어린 시절엔 ‘서울내기’라며 놀림을 당했습니다. 또 1980년대 미국에서 유학할 때 아시아인인 저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였지요.

그래서일까요. 주류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비주류의 마음으로 살았던 저는 한쪽을 택하라는 주변의 요구를 받기도 했습니다. 2003년 엘지(LG)가 국내 최초로 재벌체제를 졸업하고 지주회사체제로 넘어간 때의 일입니다. 몇년에 걸친 지배구조 전환 과정에서 여러 계열사 간에 수없이 많은 주식 교환이 일어나야 했습니다. 당시 한 시민단체가 지배주주의 이익이 극대화되고 소액주주는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저는 회사가 하고자 하는 일이 옳은 것이라면 상호 이해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대화 채널을 자청했습니다. 시민단체에 강경 대응하자는 내부 목소리에 제가 타협점을 찾자고 했더니 한 임원이 “당신은 도대체 회사 편입니까, 시민단체 편입니까”라며 불만과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한쪽을 택하라는 것이었지요. 물론 그 임원은 제게 사과했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개척자로서의 경계인

‘경계인’으로서 삶을 살았지만, 사실 제게 그 용어는 좀 생경합니다. 재독 사회학자인 송두율 교수는 20여년 전 저서 ‘경계인의 사색’에서 자신을 “경계의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경계선 위에 서서 상생의 길을 찾아 여전히 헤매고 있는 존재, 경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한때는 경계인이라는 단어가 비자발적 이주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경계인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글은 약 10년 전, 크로스오버 아티스트 양방언씨 인터뷰 기사입니다. “아버지 시대의 경계인들은 폐쇄적이고 강고한 구심력의 희생양이었는지 모르지만, 이제 양방언 시대의 경계인들은 경계를 딛고 올라 경계를 허무는 개척자가 된다. 그의 표제곡처럼 양방언은 지금 ‘프런티어’로 진화하는 중이다.”(한겨레 2014년 12월13일치) 자신의 중심을 가지고 양쪽을 오가면서 양쪽을 다 보고 판단하면, 실은 경계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실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경계의 양쪽에 알릴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남편이 독일인인 아주 가까운 친구가, 고1이 된 딸을 몹시 걱정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딸이 언젠가부터 샤워할 때 콧노래를 부르지 않더니,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고 집중이 안 된다며 짜증을 낸다고 했습니다. 또 공부가 안 된다고 우울해하더니, 1년 넘게 생리가 중단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거식증의 증상이었습니다. 그 엄마는, 해가 좋은 어느 날 딸과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어렵사리 대화를 할 수 있었답니다.

엄마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자기도 모르겠다며 버티던 아이는 분노와 절망감으로 범벅이 된 말을 쏟아냈습니다. “나는 독일인도, 한국인도 아니고 도대체 뭐지. 다른 아이들이 입는 옷을 입고 싶어도 제대로 맞는 것이 없고. 사람들은 자꾸 ‘넌 독일인이냐 한국인이냐’고 물어봐.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소위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었던 것이지요. 엄마는 한국 사람이라 독일 사람의 몸매를 물려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했답니다. 하지만 옷을 몸에 맞추어 입어야지 남이 만들어놓은 옷에 너의 몸을 맞추려는 건 우습지 않으냐, 우리 딸이 남의 노예가 되어서 자기를 잃는다면 참 억울할 것 같다고 했답니다. 독일인도 한국인도 아니고 그냥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것이지,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자기 자신을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답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몸과 마음을 회복한 그 아이는 이제 20대 중반을 넘은 어엿한 젊은이가 됐습니다. 기존의 어떤 집단에 속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여러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을 좋아하고, 잘 어울리고, 인권을 위해 일하고 싶어 그런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경계를 딛고 올라 경계를 허무는 개척자가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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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지평을 확장하는 ‘성장’

불교에서는 “경계를 짓지 말라”는 경책을 합니다. 인위적으로 구분 짓고 이분법적으로 판단하고 개념화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개념을 활용하되 개념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뜻일 겁니다. 사물과 현상을 구분 짓는 경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개념화해 집착하면 결국 고정관념이 되고 우리의 마음은 본원적 자유를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체도 ‘경계’(境界)로 분리하는 것을 ‘경계’(警戒)합니다. 세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세포와 구분 짓는 경계선이 필요한데 이 세포벽은 외부로부터 영양분은 받아들이고 노폐물은 배설시키는 성장의 통로 역할을 합니다. 세포와 세포 밖은 구분되어 있지만 분리돼 있지는 않은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경계선이 철벽처럼 고정돼 있지 않은 덕에 안팎의 숨쉬기를 통해서 내 마음의 씨앗이 발아하고 열매 맺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근원적으로는 경계 넘어 안과 밖이 서로가 주고받는 것이니 굳이 안팎이 다른 둘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듯합니다. 둘이 아닌데 둘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면서 온갖 갈등과 폭력이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갈등이 그러하고 정치적 갈등도 그러합니다.

켄 윌버는 책 ‘무경계’에서 “성장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지평을 확대하고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밖을 향한 조망과 안을 향한 깊이라는 양편 모두에 있어서 경계의 성장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경계가 성장한다는 말은 아마도 국량이 넓어진다는 뜻이겠지요. 원불교에서는 ‘심량(心量)이 호대하면 모든 경계가 스스로 평안해지나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삶에서 겪게 되는 경계들은 실은 현실이 주는 커다란 선물인 것도 같습니다.

노년이 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오면서 익숙해진 것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기존의 가치관은 더욱 굳고 딱딱해집니다. 젊은이들과의 소통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기존의 경계 안에 자신을 가둡니다. 그런데 늙는 것과 낡는 것은 다른 것 같습니다. 늙지만 낡지 않으려면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근력강화운동을 하면서 어떤 때는 너무 힘들어서 “김 코치, 제발 무게 좀 안 올리면 안 되나. 이제 좀 익숙해져서 할 만하니까 또 올리네” 하니 코치가 말합니다. “회원님,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에 저는 정신이 번쩍 들어 다음 단계로 도전하게 됩니다. 성장은 변화이고 경계를 넘는 노력으로 가능해지는 것 같습니다. 경계를 딛고 올라서 경계를 허물면, 노년의 나의 삶은 무채색의 잿빛이 아니라 무지갯빛 천연색으로 아름다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삶을 배우는 사람

2016년 엘지(LG) 인화원장으로 퇴임한 뒤 삶의 방향을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로 바꿨다. 은퇴와 노화를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기록한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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