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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 사이
조울증
게티이미지뱅크

40대 여성 민주(가명)씨는 주부입니다. 남편인 경석(가명)씨는 무역을 하는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타이·베트남 등 외국 출장도 자주 있는 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민주씨는 우연히 친구의 친구를 통해 남편의 에스엔에스(SNS) 계정을 보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최근 헬스클럽에서 피티(PT·개별 트레이닝)를 받으며 운동하는 사진들을 열심히 올리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보니 누군가 옆에서 찍어준 것 같았습니다. 댓글 중엔 어떤 사람이 남편에게 사진이 잘 나왔느냐며 확인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댓글을 단 사람은 여성이었고 에스엔에스 계정에는 한 남자와 다정하게 여행을 다녀온 사진이 있었습니다.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은 교묘하게 가려져 있었지만 민주씨의 눈에는 경석씨로 보였습니다.

민주씨는 그날 밤에 귀가한 남편을 보고 에스엔에스에 있는 사진에 대해 따져 물었습니다. 경석씨는 사진 속 남성은 자신이 아니라며 민주씨가 의처증이 있는 것 같다고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민주씨가 해당 사진이 촬영된 장소와 날짜가 경석씨가 갔던 출장지·일정과 똑같다며 증거를 대자 경석씨는 더 이상 부인하지 못하고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경석씨는 신혼 초에도 결혼 전에 사귀던 여성과 만나다가 민주씨에게 걸려 크게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여자 문제로 속을 썩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만난 여성은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며 친해진 사이였다고 합니다.

충동조절장애 의심돼 병원 찾으니

민주씨는 이혼할 결심을 하고 이혼 전문 변호사를 찾아갔습니다. 변호사와 재판 준비를 하며 증거를 모으다 보니 경석씨의 행적을 추가로 알게 되었습니다. 주말에 여성과 만나 골프를 함께 하는 일도 많았고, 고가의 명품을 선물해준 경우도 있었습니다. 자신에게는 인색하기 그지없는데 만나는 여성들에게는 아낌없이 돈을 쓴 것을 확인하고 민주씨는 화가 나서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경석씨와 더 이상 살기는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경석씨는 민주씨와 이혼할 생각이 없었고 “이제 다시는 안 그러겠다”며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경석씨는 외도 외에도 사고를 치는 경우가 더 많아졌습니다. 올해 초에는 사업을 해서 번 돈으로 외국에서 도박을 하다가 큰돈을 잃기도 했습니다. 귀가 얇아서 다른 사람들의 말에 잘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친구 말만 듣고 주식에 투자해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최근엔 외국 주식에 투자하느라 잠을 안 자고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48시간 동안 잠도 안 자고 다음날 근무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쉽게 성질을 내고 길 가던 사람과 싸우는 일도 생겼습니다.

민주씨는 남편이 밉고 이혼 준비 중이었지만 최근 상태를 봤을 때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경석씨도 자신이 충동조절장애가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민주씨는 경석씨를 설득해 정신건강의학과를 함께 방문했습니다. 진료실에 온 경석씨는 40대 아저씨로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근육질 몸매를 하고 굵은 금목걸이에 해변가에서나 어울릴 것 같은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체력이 좋아서 일주일은 밤을 새워도 문제없다고 했습니다. 심리검사 결과 경석씨는 말의 논리성이 부족하고 비약이 심한 특징을 보였습니다. 말이 빠르면서도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했습니다.

연중 기분의 변동이 있었습니다. 주로 2월 중순부터 3월에는 기분이 들뜨고 감정 기복이 심해졌고 10∼11월에는 가라앉는 패턴을 보였습니다. 초봄에 기분이 불안정할 때 뒷일을 고려하지 않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risk-taking behavior)이 증가했습니다. 외도, 도박, 약물 남용, 무리한 투자 등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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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하던 아버지 닮아

경석씨는 진찰 결과 ‘양극성 장애’로 진단됐습니다. 양극성 장애는 ‘조울증’이라고도 불리며 비정상적인 흥분 상태인 조증 삽화와 우울 상태인 우울 삽화가 번갈아 나타나는 질환입니다. 증상이 몇주 또는 몇개월 동안 지속된다고 해서 ‘삽화’라고 합니다. 기분장애의 대표적인 질환 중 하나로 일반적인 우울증과는 달리 조증과 우울의 양극을 보이는 차이가 있습니다. 주로 2월 중순부터 3월까지 초봄에 나타나는 조증은 일조량이 빠르게 증가되면서 눈으로 들어간 빛에 의해 뇌가 자극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경석씨는 진단 내용을 들으며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싸우는 일이 많았는데 그러고 난 뒤 며칠 동안 집에 안 들어오는 일이 잦았습니다. 어머님은 아버지를 ‘웬수’라고 불렀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항상 “두 집 살림을 한다”고 했는데 어린 경석씨는 당시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어릴 적부터 집안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가 무척 싫었고 심지어는 돌아가실 때 임종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아버지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난 뒤 자신에게 무척 화가 났습니다. 양극성 장애까지는 아니더라도 감정 기복이 있는 양극성 성향이 있는 사람은 아버지를 포함한 ‘권위를 가진 존재에 대한 분노’(anger against authority figure)를 지닌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부자가 양극성 성향을 함께 가진 사례도 흔히 있습니다. 이것을 스스로 알고 자신의 감정 기복과 예민성을 잘 관리하면 성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추진력이 되지만, 그러지 않으면 싫어하면서도 닮아가게 됩니다.

경석씨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상담을 통해 자신이 기분이 들떴을 때 했던 일들을 확인했습니다. 잠을 안 자도 피곤하지 않았던 것, 무리한 투자를 하고 큰 손해를 본 것, 도박을 한 것, 외도를 한 것 등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이유 없이 화가 나고 충동적이고 산만한 특징을 보였습니다. 경석씨는 감정의 기복을 조절하는 약물치료를 받으면서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매일 기록하며 기분의 변동을 체크하고 있습니다. 기분이 불안정해질 때는 일찍 귀가해서 잠을 푹 잡니다. 주위 사람들과 갈등을 만들지 않도록 주의해서 화날 일을 피합니다. 매사를 민주씨와 상의해서 피드백을 받고 자신이 무리한 일을 진행하지 않는지 검토했습니다. 이를 통해 이제 자신을 잘 관리하고 있고 부부간의 사이도 회복되었습니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책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상담소’를 썼습니다. 글에 나오는 사례는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으며,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경우를 통합해서 만들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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