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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김대중…대통령의 국정일지
⑧ 박정희 기념관 건립

1999년 5월 TK 원로 만찬 앞두고 ‘국정노트’ 작성
박정희에 대한 소회 및 화해 의지 솔직하게 기술

“10·26 전에 박 대통령에 면담 요청했지만 거절
그때 받아들였다면 ‘성공한 대통령’ 됐을 것…”

“박정희와 나는 한국정치 두 축, 서로 미워하고 싸워
과거 털고 화해하자…상징으로 박정희기념관 건립”
DJ가 명예회장, 측근 권노갑이 부위원장 맡아 추진
1999년 5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이 대구 그랜드호텔에서 신현확 전 국무총리(맨 왼쪽), 김준성 전 부총리(김 대통령 오른쪽) 등 대구·경북(TK) 원로 30여명과 만찬을 시작하기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 대통령은 “오늘은 참으로 뜻깊은 밤”이라며,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연합뉴스


1999년 봄,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로 권노갑씨(현 김대중재단 이사장)를 불렀다. 디제이(DJ)의 목포상고 후배인 권 이사장은 해방 직후부터 ‘정치인 김대중’의 비서로 고락을 함께해온 최측근이었다. 디제이는 권 이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와 자네가 박정희 정권에서 가장 탄압을 받은 사람 아닌가? 정치적 화해를 한다는 상징적 의미로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 사업을 같이 하자. 기념사업회장은 박 대통령 시절 경제 부총리를 지낸 신현확씨(최규하 대통령 때 국무총리를 지냈다)가 하는 게 좋겠다. 내가 명예회장을 맡을 테니, 자네가 박 대통령 딸인 박근혜 의원(박근혜씨는 1998년 4월 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과 함께 부회장을 맡아서 일을 추진해보라.”

권노갑 이사장은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 기념사업회의 명예회장을 맡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박 대통령은 디제이를 탄압하고 죽이려고까지 했던 사람 아닌가. 김 대통령 본인이 명예회장을 맡고 나를 박근혜씨와 함께 부회장으로 지명한 것은 아마도 김대중 정부 아래서 박정희 기념사업을 제대로 추진하겠느냐는 보수 쪽의 의구심을 지우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지원하겠다고 말한 건 집권하기 이전부터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디제이피(DJP) 연대’를 하면서 ‘대통령이 되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김종필 전 총리는 증언록 ‘소이부답’에서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1997년 10월27일 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한광옥 부총재를 데리고 청구동 우리 집을 비밀리에 찾아와서 ‘김 총재님, 대선에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간절히 부탁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따지고 보면 총재님(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수모와 박해를 당한 사람 아닙니까? 내가 그 원과 한을 다 풀어드리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첫째, 내각제 개헌을 꼭 해주십시오. 또 국민화합 차원에서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하나 세워주십시오.’ 디제이는 ‘아, 여부가 있겠습니까’라며 흔쾌히 약속했다.”

김종필 총재는 연대의 조건으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내세웠지만, 실제로 이뤄지리라 확신하진 못했던 듯싶다. 김영삼 대통령도 1992년 대선 때 그 약속을 했지만, 대통령이 된 뒤엔 지키지 않았다고 김 총재는 말했다. 집권 후 디제이가 실제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시작하자 김 총재는 “정치인이 약속을 깨는 건 비일비재한 일인데 이 약속은 지켜줘서 고맙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 대통령은 1998년 2월 취임 직후부터 박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중권씨(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냈다)는 “1998년 4월 박근혜씨가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직전에 디제이가 나를 불러 ‘피해자인 살아 있는 대통령이 가해자인 돌아가신 대통령을 용서한다면 동서 화합의 징표가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해 큰 감동을 받았다”고 ‘월간조선’ 인터뷰(2017년 6월호)에서 밝혔다. 김중권 전 실장은 “나는 신현확 전 총리 등 대구·경북(TK) 원로들을 찾아가 디제이의 뜻을 전했다. 모두 선뜻 믿지 않았다. 디제이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쇼’라는 반응이었다. (1999년 5월에) 디제이가 이들과 식사를 같이 하면서 자기 뜻을 설명하자 비로소 디제이의 진심을 믿게 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5월13일 박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를 방문해 대구·경북 핵심 인사 30여명과 저녁을 함께했다. 대구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만찬엔 신현확 전 국무총리, 김준성 전 부총리, 정수창 전 대한상의 회장, 이원경 전 외무장관, 김수학 전 새마을중앙회장, 문희갑 대구시장, 이의근 경북지사, 박찬석 경북대 총장, 김상근 영남대 총장, 김관용 구미시장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대구 ‘매일신문’은 그날 기사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과 역사적인 화해를 했다”고 평했다.

만찬을 앞두고 김 대통령은 참석자들에게 할 얘기를 한장짜리 국정노트에 정리했다. 이 노트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김 대통령의 솔직한 심경을 엿볼 수 있다.

1999년 5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이 대구·경북(TK) 원로들과 만찬을 앞두고 작성한 국정노트.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소회와 평가가 담겨 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박 대통령 기념사업 관련 만찬> 99.05.13

1. 10·26 사태 시의 나의 소회 - 생전에 대화 못 한 것
2. 79년 봄의 나의 면담 요청 - 성공하는 대통령
3. 누구나 생전에는 찬반의 대상 - 나의 입장은 반대 무
4. 우리는 한국 정치의 두 축
5. 박 대통령 이룬 경제적 근대화 부인 못해. 국민적 공감대
6. 전직 대통령은 부정의 대상, 이제 처음으로 존경과 평가의 여론이 우세, 하면 된다는 자신감
7. 기념사업 위해 애쓴 기념사업회에 감사
8. 정부도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 제5조의 ‘기념사업의 지원을 할 수 있다’에 의거 지원 불석(不惜·‘아끼지 않는다’는 뜻)
9. 92년 출마 시 묘소 참배해서 화해, 그때는 선거 시, 이제는 출마 없다. 진정한 화해의 심정, 오늘 저녁 참으로 뜻깊은 밤
10. 서로 미워하고 싸우던 적대 - 과거를 훌훌 털고 화해
11. 여러분도 화해의 대열에 동참 - 박정희 대통령의 영전에 보고하자
김 대통령은 우선, 박 대통령이 암살당한 1979년 10·26 사태를 보면서 그와 생전에 대화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고 적었다. 김 대통령은 그해 봄에 동교동계인 예춘호·양순직씨 등을 청와대로 보내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박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다. 유신 체제가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디제이는 ‘대통령과 나는 20년 가까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주 앉아 대화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실로 나라가 위중합니다. 조건은 없습니다.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해주십시오. 대신 내 이야기도 하겠습니다. 왜 서로를 싫어하고 의견이 다른지 그 실체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뜻을 차지철 실장을 통해 박 대통령에게 전했다.(‘김대중 자서전’, 2010년) 그러나 한참 후에 거절의 답이 왔다고 한다. 김 대통령이 국정노트에 “그때 면담을 받아들였다면 박 대통령이 ‘성공하는 대통령’이 되는 데 도움이 됐을 텐데…”라고 토로한 건 이런 맥락에서였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자신과 거의 대등하게 겨뤘음에도, 박정희는 김대중을 모질게 탄압했을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배제했다. 1970년대 유신 독재에 맞선 대표적인 두 정치인, 김대중과 김영삼 가운데 박 대통령은 야당 총재이던 김영삼과는 단독 영수회담(1975년)을 했지만 김대중과는 단 한 번도 만나질 않았다.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은 “김대중은 박정희의 공화당 정부가 가장 싫어한 야당 공격수였다. 3선개헌과 유신을 앞장서 반대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김대중만큼 박정희의 어려운 정책을 지지해준 야당 인사도 없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에 야당 의원으론 드물게 조건부 지지 의사를 밝혔다. 월남 파병 때는 박순천 민중당 대표와 함께 월남 현지에 가서 장병들을 격려한 게 디제이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모르겠다. 아마도 김영삼은 영남 출신이고 김대중은 호남 출신이란 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국정노트에 “박 대통령과 나는 한국 정치의 두 축이었다. 서로 미워하고 싸웠던 적대적 관계였지만 이제 그런 과거를 훌훌 털고서 화해하겠다. 여러분도 화해의 대열에 동참해달라”고 대구·경북 원로들에게 요청했다. 이런 화해 시도가 영남과 보수 표를 의식한 정치적 제스처가 아니란 점도 강조했다. “1992년 대통령선거 출마 때 동작동 국립묘지의 박 대통령 묘소를 참배했다. 그때는 다분히 선거를 앞둔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현직 대통령 신분이니까 더는 표를 의식할 필요가 없다. 진정으로 화해하겠다는 생각이고, 참으로 뜻깊은 밤이다”라고 심경을 밝혔다. 기념관을 꼭 건립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영전에 보고하자’는 말까지 노트에 적었다.

디제이는 ‘대통령 박정희’의 긍정적 유산으로 “그가 이룬 근대화의 긍정적 측면에선 국민적 공감대가 이뤄져 있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국민에게 불어넣었다”는 점을 평가했다. 그러나 ‘독재자 박정희’의 과오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대구·경북 원로들을 만나는 자리니까 그들의 정서를 의식해서 국정노트에 일부러 적지 않은 거로 보인다.

2010년 출간된 ‘김대중 회고록’엔 박정희 레거시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담겨 있다. “독재자 박정희. 그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군사쿠데타는 명분이 없었다. 민주주의를 일거에 파괴한 건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었다. 그러나 나는 박정희 정권이 경제발전을 이룬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한다. ‘우리도 하면 된다’는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준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독재정권이어야만 경제를 용이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견해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날 만찬 참석자들에게 디제이는 “나는 박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비판했으나 맹세코 미워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고 대구 매일신문은 보도했다. 국정노트에 ‘누구나 생전에는 찬반의 대상 ― 나의 입장은 반대 무(無)’라고 적은 건 그런 뜻이다. 김 대통령 발언을 듣고 대구·경북 원로들은 감동했다고 한다. 매일신문은 “신현확 전 총리는 ‘위대한 결정’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재학 박대통령생가보존회장은 ‘박 대통령 밑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자들은 기념관의 ‘기’ 자도 꺼내지 않는데 가장 박해를 받은 김 대통령 말에 눈시울이 붉어진다’고 말했다”고 썼다.

만찬 다음날 김 대통령은 남궁진 청와대 정무수석을 불러 박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챙기라고 지시했다. 남궁진 전 수석의 얘기다. “곧바로 고건 서울시장을 찾아가 기념관 터를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나와 고건 시장이 노량진과 상암동의 부지 후보지를 함께 돌아보고 상암동으로 최종 결정했다. 건립 비용은 정부에서 200억원을 우선 지원하고, 기념사업회가 매칭펀드 형태로 500억원을 자체 모금하기로 했다.”

정부 지원금 200억원으로 2002년 1월 서울 마포구 상암동 지금의 자리에 기념관 건립의 첫 삽을 떴다. 시민사회단체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지만, 김대중 정부였기에 착공이 가능할 수 있었다. 박정희 기념관(정식 명칭은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 건립 사업은 민간 모금이 잘 이뤄지지 않아 우여곡절을 겪다가 2012년 2월 이명박 정부 때 비로소 완공하고 정식 개관했다.

평가는 엇갈린다. 그래도 의미 있는 건, 십수년간 정치적 박해를 받고 1973년엔 도쿄 납치사건으로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들었음에도 집권 이후 어떤 정치 보복도 하지 않고 박 대통령을 용서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대선 공약이나 김종필 총리와의 약속 때문이라고 보긴 어렵다. 정치인 김대중이 오랫동안 고민하면서 가다듬어온 생각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 박정희와 정치적 대결을 본격화하던 1960년대 후반부터 김대중은 ‘민주주의 정착과 평화적 정권교체 실현을 위해선 정치 보복을 하지 않는 게 필수적’이란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히기 시작했다.

박찬수 대기자 [email protected]

김대중 대통령이 1999년 5월14일 대구시청을 방문해 문희갑 시장(왼쪽) 등 참석자들과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김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박정희 기념관 건립 지원 의사를 재차 밝혔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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