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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의대 교수들의 '무더기 사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의정갈등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26일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 휴진 안내문이 붙어 있다./연합뉴스


전국 40개 의대 대부분에서 교수들이 사직서 제출을 시작한 가운데, 병원에 남아 환자를 돌보는 교수들이 있다. 이들 교수들은 전공의와 전임의들이 이탈하면서 매일 당직을 서고, 외래진료도 보고 환자들이 있는 병동을 소수의 남은 의료진과 돌고 있다. 응급실 호출도 이들이 도맡아 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한 달 넘게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과, 사직서를 낸 동료의사들의 업무까지 떠안으면서 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있다.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의 A 신경과 교수는 “원래도 일이 많았지만 일이 더 많아졌다”며 “외래를 그대로 보면서 병동 환자를 다 보고 일주일에 당직을 이틀 이상 서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유방암 환자를 전담하는 B 외과 교수는 당직뿐 아니라 병원에서 밤을 새는 숙직도 한 달에 4번 이상 하고 있다”고 말했다. B 교수는 “지금 우리 병원에서는 나와 진료지원(PA) 간호사 두 명이 전공의들이 하던 업무까지 다 하고 있다”며 “만약 우리 중 한 사람만 못 버텨도 우리 병원에서는 유방암 진료를 더 이상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병원의 C 교수는 “지금 인력이 없어서 수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며 “환자들이 수술을 받기 위해 오래 대기하거나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정부의 의대 증원에 반발하는 전공의 집단이탈 사태가 한 달을 넘어 의료공백이 현실화된 가운데 26일 오후 대구의 한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돌보고 있다./뉴스1

환자들의 불안감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B 교수는 “어떤 환자들은 ‘교수님도 사직하시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단도직입 물어보기도 한다”며 “환자들 생각에 사직은 절대 안 하겠지만 과다 업무로 건강이 나빠진다면 결국 버티기 힘들어지는 게 아니겠느냐고 답했다”고 말했다.

과도한 업무로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상황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동료를 대신하는 ‘책임감’ 때문이다. 특히 필수과들은 인력 대체가 어려워 병원에 남은 의사들이 모든 일을 다 떠안은 상황이다.

A 교수는 “신경과는 뇌를 다루기 때문에, 다른 과에서 절대 내 일을 대체할 수 없다”며 “일이 전보다 더욱 고되고 힘들어졌지만 사명감을 갖고 환자들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C 교수는 “이렇게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고 일하고 있지만 정부와 여론이 우리를 이기주의자 또는 범법자처럼 보고 있어 견디기가 힘들다”고 호소했다.

B 교수는 “지금 우리 병원에서 유방암 환자를 보는 의사가 나 하나”라며 “나마저 그만 둔다면 이 환자들은 치료받기가 어려워지므로 힘든 상황에서도 남아 있다”고 말했다.

몇 사람이 과도한 업무를 떠안은 탓에 크고 작은 의료 사고는 이미 일상이 되고 있다. B 교수는 “환자는 워낙 많고 의료진은 적으니 약이 잘못 들어가는 등 사고가 일어났다”며 “다행히 큰 일은 없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도 사고가 계속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C 교수는 “스케줄이 꼬이거나 환자에게 치료법을 번복하는 등 실수가 일어났다”며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싶다”고 말했다.

일부 언론은 묵묵히 진료 현장을 지키는 이들 의사의 미담을 소개하며 의료 현장을 떠난 의사들의 행동이 무책임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의사들의 요구가 아무리 정당해도 환자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의료 현장에 남은 의사들을 오해한 일부 의사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

하지만 환자 곁에 남은 의대 교수들은 공교롭게도 이런 동료들로부터 쏟아지는 따가운 눈총보다는 정부의 급진적인 방침에 대해 더 우려했다. 이번 사태가 잘 해결되려면 정부도 한 발짝 물러나 의료계와 진지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필수의료와 지역간 의료 인프라 불균형처럼 굵직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정부와 의료계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의대 정원도 한 번에 늘릴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늘려나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무엇보다도 “의사들이 예전처럼 사명감과 책임감만으로 버티던 세상은 끝났다”고 했다.

정부의 의과대학 증원 방침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내고 근무 현장을 이탈한 지 한 달이 넘은 가운데 20일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C교수는 “의대 증원이 필수의료나 의료 인프라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는 정답은 아니다”라며 “구체적인 대안 없이 인원만 늘려서는 오히려 수도권과 지방간 격차만 더 벌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의료계에서도 강하게 반발하는 만큼 정부에서도 한 발짝 물러나서 의료계와 진지한 대화를 해야 할 것”이라며 “필수 진료과목들의 수가를 높이고 전공의의 업무 환경을 개선하는 구체적 조치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B교수는 “정부는 2000명 증원으로 못 박듯이 발표를 했지만 의료계에서는 점진적인 증원을 원하고 있다”며 “단계적인 해결 방법이 제시돼야만 전공의들도 돌아올 명분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필수의료와 의료 인프라 지역 불균형 문제는 하루 이틀만에 쉽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며 “정책을 짜는 사람들이 10년, 20년 장기적인 목표와 비전을 세워 진행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지금은 총선을 앞두고 급조한 느낌”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전공의들이 적당한 처우 없이 사명감과 책임감만 가지고 버티던 세상은 지났다고 입을 모았다. A 교수는 “예전에는 보수도 거의 없이 100일 동안 당직을 서던 ‘100일 당직’도 가능했지만 지금은 자기 뼈와 살을 깎아 소명 의식만 가지고 일을 하는 시대는 아니”라며 “세상이 변하고 세대가 바뀌었음에 대한 이해 없이 정책을 무조건 진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C 교수는 “그렇다고 해서 후배이자 제자들인 전공의들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며 “상황이 얼른 개선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A 교수는 “한국에서 좋은 의료의 시대는 끝난 것 같다”며 “지금까지는 전공의들이 그냥 참아왔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자괴감이 들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까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이런 좋은 의료 시스템이 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관한 것과 마찬가지”라며 “이번에 이렇게 터져 나온 것에 대해 비난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B 교수는 “정부에서는 공보의와 군의관을 대학 병원에 투입하겠다고 했지만 우리 병원에는 아무도 안 왔다”며 “전공의들이 돌아오지 않아 이번 사태가 장기화될 것 같아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나처럼 병원에 남아 있는 교수들의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졌다”며 “지금까지 10년, 20년 열심히 환자를 돌보고 연구해 온 인생 전부를 부정당하는 기분이라 몸 건강 뿐 아니라 마음까지 힘들다”고 호소했다.

C 교수는 “만약 전공의들이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예전처럼 희생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며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고 강조했다.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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