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은 'B급 캐릭터 연기 종결자'로 불린다. 노란색 바지를 입고 '닭강정'으로 변한 짝사랑을 살리기 위해 나서고, 땀범벅인 '변태남'도 주저 없이 연기한다. 최근 1년 새 그가 출연한 드라마 '닭강정' '마스크걸' 'LTNS' 속 그의 모습. 넷플릭스, 티빙 제공

"길에서 노래 부르며 가는 사람 실제로 봤어." 친구와 통화하며 걷던 여고생이 멈춰선다. 온몸으로 웨이브를 타고 발까지 구르며 노래 부르는 남자가 신기해서다. 남자는 노란색 바지에 분홍색 셔츠를 입고 있다. 행동도 차림도 기이한 그가 걸을 때마다 행인들은 그를 피하려 양옆으로 홍해처럼 갈라진다. 지난 15일 공개된 넷플릭스 새 시리즈 '닭강정' 속 배우 안재홍(38)의 모습이다.

'닭강정' 속 고백중(안재홍). 넷플릭스 제공

'막춤'을 아이키에 배운 용기

드라마에서 안재홍이 맡은 역은 기계 회사 인턴 '고백중'이다. 어려서부터 가수의 꿈을 키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춤을 추며 노래하고 곡을 만드는 게 취미. 눈치 없이 자기만의 세상에 폭 빠져 사는 '오타쿠' 캐릭터에 안재홍은 진심이다. '닭강정' 제작 관계자들에 따르면, 안재홍은 길거리에서 어떤 막춤을 춰야 하나 고민하다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서 준우승한 댄서팀 훅의 리더 아이키에게 연락했다. 기타 연주와 노래는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인연을 맺은 박상우 음악감독에게 따로 배웠다. 사력을 다해 '병맛 연기'를 준비한 그는 드라마에서 닭강정으로 변해 버린 짝사랑 최민아(김유정)의 얼굴에 물엿을 발라주며 해맑게 웃는다. "웹툰을 보면서 고백 중이 저와 눈썹까지 닮은 것 같더라고요. 원작 작가가 드라마 속 저를 보고 '웹툰을 찢고 나온 거 같다'고 해주셔서 뿌듯했죠." 1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안재홍의 말이다.

드라마 '마스크걸'에서 주오남(안재홍). 넷플릭스 제공

"머리숱 많네요?" 제일 많이 듣는 말

이런 안재홍에겐 요즘 '은퇴설'이 끊이지 않는다. 진짜 은퇴설은 아니다. 최근 1년 새 연이어 출연한 작품에서 다 내려놓고 제대로 망가진 그에게 누리꾼들이 찬사를 담아서 하는 우스개다. "저렇게까지 하다니, 연기활동 그만두기로 한 것 아니야?" 그는 '마스크걸'(2023)에선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리얼돌'을 상대로 혼잣말하는 주오남을 연기했고, 'LTNS'(2024)에선 은행 대출까지 박박 끌어모아 낡은 아파트를 샀지만 높은 금리에 허덕이느라 김치만 두고 밥을 먹고 성욕은 손으로 혼자 해결하는 사무엘로 나왔다.

요즘 K콘텐츠 업계가 허리띠를 졸라매며 제작 편수를 줄여도 안재홍 앞엔 신작 대본이 수북이 쌓인다. "안재홍을 대체할 만한 'B급 캐릭터 종결 코미디 배우'를 찾기 쉽지 않기 때문"(이병헌 '닭강정' 감독)이다.

영화 '족구왕' 속 복학생 만섭(안재홍). 광화문시네마 제공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속 정봉이(안재홍). tvN 제공

안재홍은 영화 '족구왕'(2014)과 드라마 '응답하라 1988'(2015)에서 엉뚱하면서도 순박한 모습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친근함의 틀을 깨고 나온 그는 '마스크걸' 등을 통해 다소 혐오스러운 캐릭터까지 도전하며 B급 캐릭터 연기의 영역을 넓혔다. 안재홍은 "(머리) 숱이 생각보다 많네요"란 얘기를 요즘 인사말처럼 듣는다.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난 변태 캐릭터 주오남을 찰떡같이 소화한 여파다. 안재홍은 "일부 스태프들이 그를 못 알아봐 '여기(촬영장) 들어오시면 안 돼요'"라며 제지도 당했다. 넉살 좋아 보이지만 데뷔 초 그에게 오디션은 '공포'였다. '응답하라 1988' 오디션도 너무 떨어 세 번 만에 간신히 붙었다. 그런 그는 이전에 보지 못한 캐릭터를 보면 "(아이처럼) 신이 난다"고 말했다. 숫기는 없지만 그가 배역 모험을 주저하지 않는 이유다.

드라마 'LTNS' 속 사무엘(안재홍). 티빙 제공

독립영화 현장서 구르고 극장서 아르바이트

유명해지기 전 안재홍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촬영 현장 연출부에서 활동했다. 2009년 단편 영화 '구경'으로 데뷔한 그는 20대엔 힘들게 연기했고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도 했다. "비호감이고 불쾌한 캐릭터인데 연기에 '짠내'가 느껴져 밉지 않게 만드는 게 안재홍의 매력"(박생강 드라마평론가)인 배경이다.

"안재홍은 곰 같지만 여우 같은 배우"(배우 류승룡)로 불린다. 촬영장에선 '안테일'(안재홍+디테일)로 통한다. "주오남의 변태스러움을 부각하기 위해 안재홍은 안경에 로션을 발랐고 대본에 없는 대사인 '아이시떼루'(일본어로 사랑한다는 뜻)를 외치며 촬영"(김용훈 '마스크걸' 감독)했다. 'LTNS'에서 불륜을 추적하는 그는 늘 다린 와이셔츠를 입고 택시를 몬다. 안재홍은 "택시가 극중 인물에 그만큼 소중한 공간이란 걸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광기 어린' 연기는 그렇게 현실적으로 카메라에 담겼다.

안재홍이 그리는 배우 안재홍의 미래는 뭘까. "'닭강정'에서 민아가 '백중씨는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눈을 바꾸고 있다'란 말을 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대사예요. 처음엔 몰랐는데 곱씹을수록 배우에겐 정말 멋진 말처럼 들리더라고요. 저도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한국일보

양승준 기자 ([email protected])